독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앞마당에 전시된 바그너 미니어처 조각상.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사진찍는 곳이다./김기철기자


‘홀랜더’ 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탄호이저’ 거리를 걸었다. 좌회전해 ‘트리스탄’ 거리로 들어서자 오른편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나타났다. 숙소에서 극장까지 10분 남짓 걷는 동안 바그너 오페라와 주인공 이름을 딴 거리로만 이어졌다.
인구 7만4000명의 독일 바이에른주 북부 소도시인 바이로이트는 바그너(1813~1883)에 의한, 바그너를 위한, 바그너의 도시다. ‘라인의 황금’ 호텔, ‘로엔그린’ 온천처럼 구석구석 바그너 자취가 남아있다. 매년 여름 ‘반지’ 4부작을 비롯, 바그너 오페라만 올리는 페스티 생활비대출만 벌에 음악 팬들이 몰려온다. 내년 150주년을 맞는 세계적 축제다.
◇빌헬름 1세, 브람스, 차이콥스키 등 저명인사 몰려
1876년 8월 13일 유럽 각국의 군주, 왕족과 귀족, 예술가, 지식인들이 갓 준공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몰려들었다. 통일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를 비롯, 리스트, 브람스 새마을금고중앙회 지원동기 , 차이콥스키, 그리그, 구노, 생상스, 브루크너, 말러는 물론 철학자 니체,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 아돌프 멘첼 등이었다. 극작가이자 북유럽 신화 연구자이며 작곡가이자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한 ‘수퍼스타’ 바그너의 예술적 성취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날 출범한 바이로이트 축제 첫날 프로그램은 ‘라인의 황금’. 17일까지 ‘발퀴레’ ‘지크 세곡동 보금자리주택 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니벨룽의 반지’(이하 ‘반지’)4부작 초연이 이어졌다. 지하 11m까지 파 내려간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관현악의 장대한 사운드는 청중의 환호를 받았다. 기립 박수와 함께 ‘바그너’를 연호하는 함성이 극장을 가득 메웠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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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의 명가수' 3막 장면. 뮤지컬 연출로 이름난 마티아스 다비츠는 화려하면서도 대중적인 무대 연출로 호평받았다. Bayreuther Festspiele / Enrico Nawrath


◇2025 바이로이트의 팡파르
폭염이 한창이던 8월 중순 생애최초주택구입자란 바이로이트를 찾았다. ‘그린 힐’로 알려진 언덕 위 잔디밭엔 황금빛 소형 바그너 전신상이 수십 개 놓여 있다. 고개 숙여 인사하거나 지휘하는 포즈,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커튼콜에 나서는 모습 등 갖가지 바그너를 만날 수 있다. 축제극장 2층 테라스에서 트럼펫·트롬본 주자들이 팡파르를 울리자 관객들이 극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공연 시작 15분, 10분, 5분 전 울리는 팡파르는 축제의 트레이드마크다. 올 축제(7월 25일~8월 26일) 신작인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시작됐다.
드레스덴 젬퍼오페라를 이끄는 다니엘레 가티가 지휘를 맡고 뮤지컬 연출로 이름난 마티아스 다비츠가 이끈 이 작품은 나치즘과 반(反)유대주의 비판이라는 정치적 색깔을 빼고, 희극적 재미를 살렸다. 신작으론 이례적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답게 음악과 연출, 무대 모두 훌륭했다. 한국 성악가로는 거의 10년 만에 바이로이트 축제에 복귀한 베이스 박종민은 주요 배역인 포그너로 출연, 합격점을 받았다.



바이로이트 시내에 있는 바그너 저택 '반프리트'. 앞 조각은 바그너 저택을 짓는 경비를 지원한 바이에른 왕국 루트비히 2세. 바이로이트 축제를 지원한 청년 군주였다./김기철 기자


◇쿠션 없는 딱딱한 나무 의자
바그너가 기획하고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여름철 한 달 바그너 오페라만 올리는 전용 극장이다. 바그너가 엄선한 작품 10개만 번갈아 올린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부터　‘파르지팔’까지다. 올해는 ‘반지’ 4부작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그린’이 공연됐다.
이 극장은　불편하다. 관객은 지휘자나 오케스트라를 볼　수 없다. 무대　앞 깊숙이 내려앉은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하기　때문이다. 음량이 큰 금관악기는 지휘자에서 멀리 가장 깊은 곳에 배치했고, 위쪽에 덮개까지 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정제된 소리가 위로 올라오면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바이로이트 특유의 ‘바그너 사운드’다. 이 극장 음향은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화려한 샹들리에나 황금빛 조각, 박스석도 없다. 관객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공연에만 집중하도록 설계했다. 객석은 중간 통로 없이 일렬로 이어진다. 가운데 자리에 앉으려면 주변 모든 사람이 일어나야 들어갈 수 있다. 정장 차림 관객들은 손에 든 부채 하나에 의지한 채 에어컨 하나 가동하지 않는 극장에서 더위를 견뎌야 한다. 딱딱한 나무 의자엔 쿠션이 없어 허리에 통증을 느낄 정도다. 이런 자리에서 대여섯 시간을 버텨야 한다. 오후 4시에 시작한 공연은 밤 10시를 넘기기 일쑤다. 막간 휴식은 1시간. 보통 두 번 정도 휴식 시간을 갖는다. 맥주나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는 시간이다.



바이로이트 시내에선 바그너 조각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있다. 가게 앞에 앉아 행인을 지켜보는 바그너 조각./김기철 기자


◇불꽃 튀는 티켓 전쟁
바이로이트 축제 티켓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1년 전 극장에 티켓 구입 요청 편지를 보내도 수요가 워낙 많다 보니 티켓 구경하기 쉽지 않다. 요즘은 온라인 티켓 구입도 가능하지만 어렵긴 마찬가지다. 올해 축제 개막작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몇 달 전부터 전회(총 7회) 매진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내려오면 바그너가 살던 반프리트 저택이 나온다. 바그너 기념관과 박물관으로 쓴다. 바그너와 코지마 부부의 조각과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부부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리스트의 딸이자 당대 유명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였던 코지마(1837~1930)는 스물네 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바그너와 결혼했다. 코지마는 바그너 사후(死後) 반세기 가까이 전권을 휘두르며 바이로이트 축제를 이끌었다. 코지마가 없었다면 오늘의 바이로이트 축제는 없었을 것이다.
축제극장 앞에는 바그너 두상이 서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주변엔 바이로이트 축제에 출연한 성악가·연주자들의 패널이 설치돼 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다. 바그너를 편애한 히틀러가 저지른 폭력은 바이로이트 축제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프리트 저택에도 바그너 며느리 비니프레트와 히틀러의 친밀한 관계를 증언하는 전시물을 그대로 전시한다. 바그너는 히틀러 등장 반세기 전에 죽었지만 나치 선전 도구로 동원된 까닭에 오욕의 역사와 맞닿게 됐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극장
한여름 바그너 축제가 막 내리면 ‘바이로이트 바로크 오페라 페스티벌’(9월 4~14일)이 이어진다. 축제가 열리는 도심의 변경백(伯) 극장(500석)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 중 하나다. 280년 전 건립된 이 극장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바로크 오페라 축제는 독일 공영방송이 중계하고 유튜브에도 공연 영상이 바로 올라온다. 스테판 플레브니악이 지휘한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 카운터테너 프랑크 파지올리의 리사이틀이 볼 만했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내년 150주년을 맞아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하는 ‘반지’ 4부작을 올린다. 바그너 초기 오페라 ‘리엔치’도 바이로이트 사상 처음으로 공연된다. 내년 축제는 벌써 진행중이다. 축제 폐막 다음 날인 8월 27일 온라인 티켓 주문이 시작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