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이 글은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제주올레 공식 블로그에 연재 중이다. [헤드라인제주]는 길 위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을 나누고 모두가 길 위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소망을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타이틀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주>
- 다시 쓰는 올레길 편지
무슨 말로 서두를 시작 해야 할지 이토록 망설여진 적도 없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는 탓도 있거니와, 그간 너무 많은 일들이 주변에서 벌어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에 온 국민의 가슴을 죄게 만든, 기상이변으로 인한 초대형 호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일을 다 그러모아서 한마디로 퉁 칠 수 있는 인삿말이 생각해보니 전혀 없는 것도 아니군요.
"폭삭 속았수다, 여러분!"

# 이탈리아 성프란체스코길과 스페인 코스타 브라바 해안길을 걸으면서




지난번 437레터에 제 편지가 빠졌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이 더러 계셨습니다. 제 글을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 한편으로는 건너뛰어 참으로 죄송하다는 마음 이 자리를 빌어 전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437레터를 마감할 무렵 지구별 어딘가를 계속 떠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레길이 있는 제주를, 서울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사는 서귀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저이지만 사랑하기에 가끔은 떠나 있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곳을 떠나야만 그곳이 더 잘 보이기도 , 일상을 훌훌 던져버린 뒤에야 그 일상이 주는 소중함을 알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지난 5월에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인 성프란체스코가 교황청이 있는 로마까지 걸었다는 로마로 가는 길 일부 구간을, 지난 6월에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코스타 브라바 해안길을 걸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 걷기에는 지난해 제주올레 길을 완주했던 미국인 크리스티나와 이탈리안인 마르게리따가 함께 했습니다. 자기네도 먼 곳 제주로 와서 40일 넘게 올레길을 걸었으니, 저도 최소한 열흘이라도 그 길을 걸어보라고 양 옆에서 강권하는 걸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고나 할까요.
이탈리아, 스페인의 바닷길, 산길, 마을길을 걷는 동안 저는 제주와는 또 다른 그곳의 독특한 풍광과 역사와 고유의 토속음식을 원 없이 즐겼습니다. 동시에 이미 몇 해 전부터 시작된 올레길의 본격적인 세계화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과 아이디어를 얻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로 여행은 또 다른 교실이요, 살아 움직이는 책임을 실감한 나날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길 위에서 만난 여러 나라의, 다른 직업의 사람들이 K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언급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제주에 관심을 보일 때마다 문화 콘텐츠와 관광 산업의 그 긴밀한 관계학을 실감하곤 했답니다.







# 다시 그 길 위에 서서, 여름올레를 시작하면서

귀국한 뒤 이런저런 밀린 일들을 처리하면서, 이리저리 자투리 시간을 내서 집 근처 올레길을 한두 시간 산책하던 중, 사무국 후배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름철에는 본디 올레꾼들이 봄가을보다 다소 줄어드는 추세지만, 지난해부터는 유독 그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가까운 일본으로 가는 여행자가 늘어나고, 여름에 걷기엔 너무 덥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분석도 곁들여서요.




"아니, 엔화 문제야 그렇다 치고! 너무 더워서 안 걷고 못 걷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산티아고길 여름철 기온은 제주를 훨씬 웃도는데도 그곳엔 여름에 순례자가 가장 많은데!"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못 걸은 올레길을 제대로 걷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지라, 그 자리에서 여름철 올레길 완주를 결심했습니다. 지난 겨울 혹독한 칼바람, 북서풍을 맞으면서도 완주했듯이 이번엔 와랑와랑한 여름 햇살 아래 완주를 해보리라! 평소 추위엔 약해도 더위에는 강한, 여름 여자 아니더냐 큰소리치면서!
이름도 정했습니다! 와랑와랑 원정대로!
시작 날짜는 7월 21일! 마지막 종주 날짜는 저도 모릅니다. 도중에 이런저런 일정 때문에 못 걷는 날도 있고, 나이가 있는지라 억지로 강행군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기 때문에!
9월 중순, 혹은 9월 하순까지 꼬박 두 달이 넘게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소식을 들은 지인 한둘이 그때그때 동행할 수도, 혼자 길을 나섰다가 길 위에서 길동무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놀멍 쉬멍 걸으멍만이 아니라, 걷다가 더우면 길 위에 널린 바당으로 풍덩 들어가서 수영을 즐기다가 걸을지도 모르고요. 단 수영은 동행이 있을 경우, 안전요원이 지키는 해수욕장에서만 할 생각입니다.
7월 21일, 60대 후반 여자 둘과 20대 후반 여자 하나, 모두 셋으로 꾸려진 와랑와랑 원정대는 아침 9시에 21코스 안내소를 출발해서 오후 3시 45분에 종점인 종달바당에 이르렀습니다(심지어 우리는 깔딱이 심하기로 악명 높은 지미봉을 오늘만큼은 안 오르고 둘레길로 걸었는데도!)
동행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오늘 완주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라야 해요! 21코스 최저속 기록으로!"

저는 총알같이 되받아쳤습니다. "요즘 저속노화 열풍이 분다면서? 걷는 것도 저속이 좋아! 그래야 제대로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으니!" 




와랑와랑 원정대


햇빛 와랑와랑한 여름에 어찌 그러냐고요? 미국의 한 여류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름은 그 눈부신 생명력으로 슬픔을 앗아 가버린다고요.
출발 지점에서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아카자봉 함께 걷기팀 11명을, 도중에서 국민대 대학생 70명으로 꾸려진 국민원정대 걷기팀을, 종점을 지나 버스정류장 가는 길에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6일 일정으로 온 두 여성 올레꾼을 만났습니다. 
아! 그리고 걷는 내내 만났습니다. 이제껏 18년 동안 올레길을 걷던 중 가장 아름답게 눈부시게 빛나는 하도, 종달 바당을! 그 바당에 풍덩 뛰어들어서 한쪽으로는 우도를, 다른 한쪽으로는 지미봉을 바라보면서 저는 세상에 외치고 싶었답니다.

아시나요, 여름올레의 이 맛을!




국민대학교 국민원대 걷기팀





상해에서 온 올레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