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목 기자]
붕괴 위험을 호소한 지 몇 년이 지나자, 이제 한국영화의 위기는 일상이 되었다. 일상화한 위기는 더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이다. 이제 더는 '천만 영화'의 몽상에 기댈 게 아니라 멸종을 피하고 후대를 기약하며 새로 씨앗을 뿌리는 고통스러운 작업에 돌입해야만 한다.
그렇게 풍전등화의 극장가는 예전엔 볼 수 없던 온갖 단말마의 시도와 실험의 장으로 역설적으로 재편되는 참이다. 재개봉 유행과 단편 개봉 기획은 대표적인 사례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이전 세계의 영광스러운 흔적이라 할 <벌새> 재개봉과 감독의 전작 <리코더 시험> 단편 개봉이 연달아 관 릴짱 객을 찾아왔다. 다시 보기 또는 최초로 연작 보기의 경험은 현재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리코더 시험>, 9살 연희와 만나다







황금성릴게임사이트


▲  <리코더 시험> 스틸


ⓒ 인디스토리




1988년 서울 도봉구, 9살 '은희'는 방앗간을 운영하는 부모님, 릴게임모바일 몇 살 많은 언니와 1살 터울 오빠와 함께 구축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빠와 엄마는 가게 꾸리느라 바쁜 데다 사이도 썩 원만하진 않고, 언니는 날라리에 오빠는 동생을 함부로 대한다. 막내는 늘 서럽다.

은희의 반에서 리코더 시험이 예고된다. 반대표로 뽑히면 발표회에서 연주할 수 있다. 부모님 앞에서 솜씨를 뽐내고 자랑할 황금성릴게임 기회다. 담임선생님 이야기에 오랜만에 가족에게 주목받을 기회라 여긴 은희는 설렘을 주체할 수 없다. 방앗간집 딸이라 다른 친구들이 무시하는 것과 달리 격의없이 대해주는 친구 '하나'의 격려를 받으며 리코더 연습에 매진한다.
하지만 늘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오빠는 공부에 방해된다며 연습을 훼방하고, 다른 가족들도 은희의 노력에 별 반응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이 없다. 리코더 소리 시끄럽다며 손찌검하는 오빠의 만행을 일러바쳐도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너무나 서럽다. 그러다가도 작은 관심과 애정에 두근거리곤 한다. 마침내 운명의 리코더 시험이 다가온다.

<벌새>의 기원이자 원형질로서의 단편 목격담










▲  <리코더 시험> 스틸


ⓒ 인지스토리




<벌새> 전에 <리코더 시험>이 있었다. <벌새>를 보고 나서 이 단편을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연작 형태임음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다. 방앗간에서 떡집으로 부모님이 생업을 변경했고, 언니는 여전히 날라리에 공부 좀 잘한다고 한 살 위 오빠는 동생을 마구 대하며 툭하면 손찌검한다. 엄마 아빠 사이는 여전히 티격태격이다. 그렇게 1994년 15살이 된 은희는 <벌새>에 모습을 드러낸다. 은희의 과거가 궁금하다면 전작을 보면 된다.

아직 유년기인 주인공, 단편 분량 탓에 <리코더 시험>의 이야기는 단순한 편이다. 9살 아이의 소우주는 누구 못지않게 광대하지만, 어른들의 잣대로는 집과 학교, 동네와 학원 정도가 전부인 아주 작은 범위다. 그냥 한 바퀴 돌면 끝날 경계선, 하지만 그 나이에 유독 민감한 감정이 있고, 협소하기에 남들에겐 그저 지나칠 일도 세상 전부처럼 무겁고 소중한 법이다. 9살 은힁에겐 리코더 시험이 그렇다.
엄마가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쉬며 건성으로 틀어놓은 올림픽(잊지 말자.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88년이다) 중계방송에서 국위와 인생 걸고 승부하는 대표팀 선수처럼 소녀는 불철주야 리코더 연습에 임한다. 드디어 시작된 시험. 하지만 간절한 주인공의 눈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관객을 응시한 후 결과는 열린 채 끝난다. 은희의 간절함과는 달리 시험 결과는 삶에서 찰나에 불과했으리라.
감독의 두 편 영화를 연대기 순으로 본다면, 은희의 성장 배경을 깨알같이 비교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교육열 때문에 가족은 대치동으로 이사했지만, 공부 잘하는 아들과 달리 부모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딸들은 독방을 얻지 못한다. 물론 집안 형편이 확 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부모님은 적어도 자식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꿈)엔 가용 자원을 아기지 않고 투입하고 있다.

15살 연희,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대면하다










▲  <벌새> 스틸


ⓒ 엣나인필름




전작의 배경인 1988년으로부터 6년이 지났다. 이제 15살, 중학교 2학년이다. 집안 분위기는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족은 대치동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했다. 언니는 성적이 좋지 않아 기껏 강남으로 이사해 놓고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눈칫밥 신세다. 떡집은 명절 대목에 정신없이 바쁘다. 엄마는 고된 일을 마치면 끙끙 앓지만, 가족은 그럭저럭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 공부보다 적당히 놀고 만화 그리는 은희는 또래 남자친구도 사귀며 관심받지 못하는 한을 푼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15살엔 몇 년 어치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대충 때우던 한문 교실에 새로 온 강사 '영지'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뭔가 다르다. 영지를 통해 은희는 알지 못하던 세계의 단면을 어렴풋이 들여다본다. 물론 곡절도 많다. 공부 잘하는 걸 무기로 오빠는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정도가 과하지 않으면 부모님도 대충 흘려넘긴다. 분하다. 단짝 '지숙'은 배신하고 사과하지 않는다. 남자친구도 소홀하다. 마음 붙일 데가 없다.
은희의 성장통을 암시하듯 귓가에 혹이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큰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단다. 두렵지만, 입원하는 딸을 챙기는 부모님이 반갑다. 하지만 일회성이다. 차라리 병원이 속 편하다. 다들 자신을 챙겨주니까. 그런 속내를 간직한 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세상으로 항해하기 위한 통과의례의 시간










▲  <벌새> 스틸


ⓒ 엣나인필름




주인공은 여전히 모든 게 불안하고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은희는 절대 빈곤에서 상대적 불평등으로 전환한 한국 사회에서 은폐된 차별과 직결된다. 성차별, 가족 내 폭력, 교육 불평등은 물론, 체감하긴 이르지만, 우리 사회 근본 모순과 만날 (원하지 않은) 기회도 겪는다. 9살 적에는 들여다볼 수 없던 세계의 복잡성이 15살 은희의 눈에 드러난다.

은희의 세계는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엄마와 아빠는 붙박이장처럼 기계적 일상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언니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인이라 늘 숨어 지낸다. 오빠는 예비 가부장 행세가 뼛속 깊이 박혀 있다. 은희 역시 언니랑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언니는 동생에게 얻어맞지는 않으니 자신이 제일 가련하다. 소소한 일탈만이 허전함을 채워준다.
하지만 리코더에 매진하던 올곧은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행착오 속에도 소녀는 단단해진다. 슬픔을 딛고 고통을 견디기란 어른들에겐 대수롭지 않지만, 은희에겐 모든 게 낯설고 새롭다. 몸에 새겨지는 상처와 흉터는 곧 내면의 고통으로 연결된다.
만남과 이별은 예기치 않게 발생하고, 수동적인 반항에 머물던 태도는 점점 속부터 굳건해진다. 그렇게 15살이 흐른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던 강제개발 반대 현수막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1994년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어렴풋이 그 해가 참 다사다난했음을 떠올리게 된다. 김일성이 죽었고 온갖 안전사고가 사회적 재난으로 판명났다. 주인공은 자신과는 동떨어진 줄 알았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불편한 울타리, 그 '껍데기를 벗고서' 세상과 마주한 은희에겐 질문과 수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주체적인 삶을 대면하려면 우회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영영 닿을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다시금 주인공의 성장을 간절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  <벌새> 스틸


ⓒ 엣나인필름




평범한 소시민 가족 눈에 비친 서울특별시, 성장만능주의 민낯,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야만의 시대'라 할 폭력과 차별의 일상이 <벌새>엔 가득하다. 화룡점정은 1994년 10월 21일 일어난 사고다. 기이하게도, 혹은 필연적으로 해당 사고를 비롯한 사회적 재난은 판박이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틈새를 폭로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다행히 주인공 주변에는 부실한 공공성을 약간이나마 완충하는 '어른'이 있다. 참 스승 '영지', 미워할 수 없는 부모님, 진단서 써주겠다는 병원장까지 생생한 군상을 통해 영화는 '리얼 월드'를 향한 사려와 통찰을 포기하지 않는다.

은희는 무사히 어른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현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담을 넘어 <벌새> 속 은희는 개인으로 가둘 수 없는 존재다. 세대 차원의 체험,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무게에 관한 공명, 개인을 속박하는 시스템의 억압이 끝없이 주인공을 조여온다. 그 위협은 스스로 물리쳐야 한다.
다시 본 <벌새>는 연약하게만 보이는 작은 새가 생존을 위해 벌이는 필사의 날갯짓을 그린다. 타임캡슐처럼 영화는 한 세대 전 세상을 재현한다. 그러나 한국영화 전성시대는 본 작품 성공 이후 거짓말처럼 소멸해 버렸다. <기생충>과 함께 2019년을 수놓았던 <벌새>의 엄혹한 시절로의 귀환은 격세지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과연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생겼나.
은희가 참혹하고 무정한 세상으로 나아가던 영화는 '현상'이라 일컬을 만큼 흥행을 초과하는 반향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후 팍팍해진 한국 사회는 <벌새>가 꿈꾸던 해방을 금세 피곤해 하며 다시 비좁은 울타리로 스스로를 감금 중이다. 한국 영화 위기론과 공동체 붕괴를 우려하는 초입에 돌아온 <벌새>를 보는 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체험이다.
<작품정보>
리코더 시험The Recorder Exam2011｜한국｜드라마2025.11.19. 개봉(메가박스 단독)｜29분감독/각본 김보라출연 황정원, 박명신, 정인기제작 보라 필름배급 인디스토리
2011 10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2011 12회 대구단편영화제 대상
벌새House of Hummingbird2019｜한국｜드라마, 성장2025.12.03. (재)개봉｜139분｜15세 관람가감독/각본 김보라출연 박지후, 김새벽, 이승연, 정인기, 박수연, 손상연, 박서윤, 정윤서, 설혜인, 손용범 외제작 에피파니, 매스 오너먼트배급 엣나인필름, 콘텐츠판다
2019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대상(제너레이션 14 플러스) 기자 admin@119sh.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