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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음민사언   댓글: 0   조회수: 3 날짜: 2025-10-16본문
북송(北宋) 초에 편찬된 백과전서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섭정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책에선 섭정을 ‘유협(遊俠)’으로 분류했는데, ‘사기’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홍광훈
서기 253년, 삼국시대 촉(蜀)에서 장군 곽수(郭脩)가 대장군 비이(費禕)를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다. 비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출사표(出師表)’에서 곽유지(郭攸之)·동윤(董允)과 함께 ‘양실(良實)’하며 ‘충순(忠純)’하다고 칭찬한 인물이다. ‘삼국지(三國志)’에는 곽순(郭循)으로도 표기된 곽수는 원래 위(魏)의 장수로, 강유(姜維)와 싸움에서 패해 항복한 뒤 촉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던 자다. 그는 새해맞이 연회에서 비이가 크게 취해 정신을릴게임종류
잃은 틈을 타서 그를 습격했다. 그리고 곧 붙잡혀 처형됐다. 이 일이 위의 조정에 알려지자, 황제가 조서에서 “그 용기는 섭정(聶政)을 건너뛰고 공적은 개자(介子)보다 훌륭하니,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뜻으로 목숨을 버려 의로움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며 시호까지 내렸다. 이 일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선 볼 수 없다.섭정은 형가(荊軻)보다 220여 년라이프스탁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물로,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네 번째로 그 행적이 실려 있다. ‘개자’는 전한(前漢) 후기의 부개자(傅介子)를 가리킨다. 서역(西域)의 누란(樓蘭)에 사신으로 간 그는 부하 몇 명과 연회석상에서 왕을 처치하고 새 왕을 세워 한나라에 복속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보다 앞서 장건(張騫)도 서역 원정으로 크게 현진소재 주식
이름을 떨쳤다. 서역에서 활약으로 유명한 후한(後漢) 초의 반초(班超)가 젊은 시절 ‘붓을 던지고 종군한다(投筆從戎)’는 뜻을 세운 것도 바로 이 둘을 흠모했기 때문이라고 사서는 전한다.그런데 ‘삼국지’의 주석자 배송지(裴松之)는 곽수에 대해 적국에 붙잡혀 항복한 자라며 애초 충절과는 거리가 멀고 명분과 의리에 부합하지 않는 광부(狂夫)에 불과하다고 혹평했삼호개발 주식
다. 그리고 ‘목숨을 버려 의로움을 얻는(捨生取義)’ 일에는 반드시 그에 맞는 도리가 있어야 하거늘, 곽수 따위를 섭정과 부개자와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위의 조정을 비판했다.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음 각오섭정은 이처럼 용감함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동진(東晉)의 갈홍(葛洪)도 그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세인들은 한 분야에서 외국인매수
특별히 뛰어나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하는 이를 두고 성인이라 일컫는다(世人以人所尤長, 衆所不及者, 便謂之聖)”며 “바둑 잘 두거나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기성(棋聖)·서성(書聖)·화성(畵聖)이라 부르듯 형가와 섭정은 용감함의 성인(荊軻聶政, 勇敢之聖也)”이라고 극찬했다. 이는 ‘포박자(抱朴子)’의 ‘변문(辨問)’ 편에 실려있다. 섭정에 대한 이런 평가는 오래전부터 보편화돼 있던 것 같다. ‘전국책(戰國策)’의 ‘위책(魏策)’에 따르면, 전국시대 말기의 세객(說客)으로 유명한 당저(唐雎)는 시황제(始皇帝)라 호칭하기 이전의 진왕(秦王) 영정(贏政) 앞에서 “섭정이 한괴를 찌를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聶政之刺韓傀也, 白虹貫日)”고 말했다.섭정의 이야기는 사마천(司馬遷)이 ‘전국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와 ‘자객열전’으로 펴내면서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한(韓)의 지(軹) 지방 심정리(深井里) 출신인 섭정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뒤 원수를 피해 누나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제(齊)로 달아났다. 백정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역시 한에서 망명한 엄중자(嚴仲子)가 찾아왔다. 엄중자는 위나라 복양(濮陽) 출신으로 한나라에 가서 대부가 돼 애후(哀侯)를 섬기다가 재상과 사이가 벌어져 피신해 온 터였다. 그는 자기를 대신해 보복해 줄 사람을 물색하고 있던 참에 섭정이 용사라는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은 여러 번 만나 교분을 쌓았다. 어느 날 엄중자가 술과 음식을 갖고 와서 섭정과 함께 마셨다. 술이 몇 잔 오간 뒤 엄중자는 어머니의 장수를 빈다며 황금 백일(百溢)을 꺼내 건넸다. 섭정이 놀라 사양했다. 한사코 주려 하는 엄중자에게 섭정이 말했다. “내가 객지에서 ‘개백정(狗屠)’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지만,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께 맛있는 음식을 올리며 봉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재물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엄중자가 섭정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자, 섭정이 대답했다. “내가 뜻을 굽혀 시정의 백정으로 살아가는 까닭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모가 계시는 동안에는 감히 남에게 몸을 맡길 수 없습니다(老母在, 政身未敢以許人也).” 엄중자는 끈질기게 황금을 주려 했지만, 섭정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 뒤 섭정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가 모두 끝나자, 섭정은 생각했다. 엄중자가 제후의 대부라는 귀한 신분으로 자기 같은 시정의 백정을 찾기 위해 천 리가 멀다 않고 찾아온 일이 고마웠다. 그런데 자신은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엄중자가 황금을 줄 때 받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알아준 것이었다. 섭정은 마음을 굳혔다. “지금 노모가 천수를 다했으니, 나는 이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쓰이겠다(老母今以天年終, 政將爲知己者用).”마침내 섭정은 복양으로 엄중자를 찾아가 복수할 상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엄중자는 한의 재상인 군주의 숙부 협루(俠累)를 지목했다. 엄중자는 협루의 친족이 매우 많고 처소 경비가 삼엄해서 자객을 보내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섭정이 나서만 준다면 여러 대의 수레를 준비하고 날랜 부하들도 동원하겠다고 했다. 섭정은 위에서 한까지는 멀지 않아 수레는 필요 없고 사람도 많으면 비밀이 새어 나갈 수 있어서 혼자 가겠다고 했다. 칼을 지팡이 삼아 들고 한에 도착한 섭정은 바로 협루의 처소로 찾아갔다. 창을 든 호위 군사가 매우 많았으나, 섭정은 곧장 뛰어 들어가 계단 위에서 단칼에 협루를 찔러 죽였다. 군사들이 에워싸자, 섭정은 크게 소리치며 수십 명을 처치했다. 그는 마침내 힘이 다하자 스스로 칼로 자신의 얼굴을 벗기고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갈라 창자를 드러내어 죽었다.한의 조정은 섭정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시신을 저잣거리에 내어놓고 천금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며칠이 지나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 생전에 시집간 누나 섭앵(聶嫈)은 소문을 듣고 동생이 저지른 일임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다. 그녀는 시신 위에 엎드려 한참이나 슬프게 울며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심정리 출신 섭정입니다. 누나인 나에게 해를 미칠까 염려해서 신원을 숨기려고 자해한 것입니다.” 이어서 큰 소리로 하늘을 세 번 부른 뒤 숨이 끊어졌다. 이 소식은 사방으로 전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열녀(烈女)라고 칭송했다.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용감한 장부라고?”…섭정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섭정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용감한 장부라며 기리는 이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청(淸)나라 중기의 대표적 문장가인 동성파(桐城派) 유대괴(劉大櫆)는 ‘신시(愼始·시작을 신중히 함)’라는 글에서 섭정을 ‘간인(奸人)’이라고 악평했다. “춘추전국 사이에 일찍이 임협(任俠)을 자처한 간인이 있었으니, 한때의 감격으로 남을 위해 복수한다며 얼굴 벗기고 창자를 드러내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 말대로 사서에 실린 섭정의 이야기가 과장 없는 실화라면 일반인의 상식과 정리(情理)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다. 섭정의 이야기는 그 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후한 말기의 저명한 문인 채옹(蔡邕)이 지었다는 ‘금조(琴操)’에 실린 내용은 이렇다. 주검(鑄劍) 장인인 섭정의 아버지는 왕명으로 칼을 만들다가 늦어서 죽음을 당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섭정은 훗날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어느 날 산에 오른 그는 우연히 신선을 만나 거문고 연주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명인이 된 그를 왕이 불렀다. 궁중으로 들어간 그는 거문고 속에 감춰둔 칼을 꺼내 왕을 찔러 죽였다.이 이야기는 형가의 친구 고점리(高漸離)가 축(筑·고대 중국의 현악기)에 납덩이를넣어 진시황에게 접근해 암살하려고 했다는 일화와 유사하다. 어쨌거나 ‘섭정이 한왕을 찌르다(聶政刺韓王)’라는 거문고 악곡이 이때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이 악곡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인 혜강(嵇康)에게로 전해져 ‘광릉산(廣陵散)’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혜강은 사마소(司馬昭)의 미움을 사서 처형될 때 마지막으로 이를 연주하고 나서 명곡의 실전(失傳)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서기 253년, 삼국시대 촉(蜀)에서 장군 곽수(郭脩)가 대장군 비이(費禕)를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다. 비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출사표(出師表)’에서 곽유지(郭攸之)·동윤(董允)과 함께 ‘양실(良實)’하며 ‘충순(忠純)’하다고 칭찬한 인물이다. ‘삼국지(三國志)’에는 곽순(郭循)으로도 표기된 곽수는 원래 위(魏)의 장수로, 강유(姜維)와 싸움에서 패해 항복한 뒤 촉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던 자다. 그는 새해맞이 연회에서 비이가 크게 취해 정신을릴게임종류
잃은 틈을 타서 그를 습격했다. 그리고 곧 붙잡혀 처형됐다. 이 일이 위의 조정에 알려지자, 황제가 조서에서 “그 용기는 섭정(聶政)을 건너뛰고 공적은 개자(介子)보다 훌륭하니,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뜻으로 목숨을 버려 의로움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며 시호까지 내렸다. 이 일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선 볼 수 없다.섭정은 형가(荊軻)보다 220여 년라이프스탁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물로,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네 번째로 그 행적이 실려 있다. ‘개자’는 전한(前漢) 후기의 부개자(傅介子)를 가리킨다. 서역(西域)의 누란(樓蘭)에 사신으로 간 그는 부하 몇 명과 연회석상에서 왕을 처치하고 새 왕을 세워 한나라에 복속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보다 앞서 장건(張騫)도 서역 원정으로 크게 현진소재 주식
이름을 떨쳤다. 서역에서 활약으로 유명한 후한(後漢) 초의 반초(班超)가 젊은 시절 ‘붓을 던지고 종군한다(投筆從戎)’는 뜻을 세운 것도 바로 이 둘을 흠모했기 때문이라고 사서는 전한다.그런데 ‘삼국지’의 주석자 배송지(裴松之)는 곽수에 대해 적국에 붙잡혀 항복한 자라며 애초 충절과는 거리가 멀고 명분과 의리에 부합하지 않는 광부(狂夫)에 불과하다고 혹평했삼호개발 주식
다. 그리고 ‘목숨을 버려 의로움을 얻는(捨生取義)’ 일에는 반드시 그에 맞는 도리가 있어야 하거늘, 곽수 따위를 섭정과 부개자와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위의 조정을 비판했다.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음 각오섭정은 이처럼 용감함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동진(東晉)의 갈홍(葛洪)도 그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세인들은 한 분야에서 외국인매수
특별히 뛰어나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하는 이를 두고 성인이라 일컫는다(世人以人所尤長, 衆所不及者, 便謂之聖)”며 “바둑 잘 두거나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기성(棋聖)·서성(書聖)·화성(畵聖)이라 부르듯 형가와 섭정은 용감함의 성인(荊軻聶政, 勇敢之聖也)”이라고 극찬했다. 이는 ‘포박자(抱朴子)’의 ‘변문(辨問)’ 편에 실려있다. 섭정에 대한 이런 평가는 오래전부터 보편화돼 있던 것 같다. ‘전국책(戰國策)’의 ‘위책(魏策)’에 따르면, 전국시대 말기의 세객(說客)으로 유명한 당저(唐雎)는 시황제(始皇帝)라 호칭하기 이전의 진왕(秦王) 영정(贏政) 앞에서 “섭정이 한괴를 찌를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聶政之刺韓傀也, 白虹貫日)”고 말했다.섭정의 이야기는 사마천(司馬遷)이 ‘전국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와 ‘자객열전’으로 펴내면서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한(韓)의 지(軹) 지방 심정리(深井里) 출신인 섭정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뒤 원수를 피해 누나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제(齊)로 달아났다. 백정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역시 한에서 망명한 엄중자(嚴仲子)가 찾아왔다. 엄중자는 위나라 복양(濮陽) 출신으로 한나라에 가서 대부가 돼 애후(哀侯)를 섬기다가 재상과 사이가 벌어져 피신해 온 터였다. 그는 자기를 대신해 보복해 줄 사람을 물색하고 있던 참에 섭정이 용사라는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은 여러 번 만나 교분을 쌓았다. 어느 날 엄중자가 술과 음식을 갖고 와서 섭정과 함께 마셨다. 술이 몇 잔 오간 뒤 엄중자는 어머니의 장수를 빈다며 황금 백일(百溢)을 꺼내 건넸다. 섭정이 놀라 사양했다. 한사코 주려 하는 엄중자에게 섭정이 말했다. “내가 객지에서 ‘개백정(狗屠)’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지만,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께 맛있는 음식을 올리며 봉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재물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엄중자가 섭정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자, 섭정이 대답했다. “내가 뜻을 굽혀 시정의 백정으로 살아가는 까닭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모가 계시는 동안에는 감히 남에게 몸을 맡길 수 없습니다(老母在, 政身未敢以許人也).” 엄중자는 끈질기게 황금을 주려 했지만, 섭정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 뒤 섭정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가 모두 끝나자, 섭정은 생각했다. 엄중자가 제후의 대부라는 귀한 신분으로 자기 같은 시정의 백정을 찾기 위해 천 리가 멀다 않고 찾아온 일이 고마웠다. 그런데 자신은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엄중자가 황금을 줄 때 받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알아준 것이었다. 섭정은 마음을 굳혔다. “지금 노모가 천수를 다했으니, 나는 이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쓰이겠다(老母今以天年終, 政將爲知己者用).”마침내 섭정은 복양으로 엄중자를 찾아가 복수할 상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엄중자는 한의 재상인 군주의 숙부 협루(俠累)를 지목했다. 엄중자는 협루의 친족이 매우 많고 처소 경비가 삼엄해서 자객을 보내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섭정이 나서만 준다면 여러 대의 수레를 준비하고 날랜 부하들도 동원하겠다고 했다. 섭정은 위에서 한까지는 멀지 않아 수레는 필요 없고 사람도 많으면 비밀이 새어 나갈 수 있어서 혼자 가겠다고 했다. 칼을 지팡이 삼아 들고 한에 도착한 섭정은 바로 협루의 처소로 찾아갔다. 창을 든 호위 군사가 매우 많았으나, 섭정은 곧장 뛰어 들어가 계단 위에서 단칼에 협루를 찔러 죽였다. 군사들이 에워싸자, 섭정은 크게 소리치며 수십 명을 처치했다. 그는 마침내 힘이 다하자 스스로 칼로 자신의 얼굴을 벗기고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갈라 창자를 드러내어 죽었다.한의 조정은 섭정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시신을 저잣거리에 내어놓고 천금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며칠이 지나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 생전에 시집간 누나 섭앵(聶嫈)은 소문을 듣고 동생이 저지른 일임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다. 그녀는 시신 위에 엎드려 한참이나 슬프게 울며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심정리 출신 섭정입니다. 누나인 나에게 해를 미칠까 염려해서 신원을 숨기려고 자해한 것입니다.” 이어서 큰 소리로 하늘을 세 번 부른 뒤 숨이 끊어졌다. 이 소식은 사방으로 전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열녀(烈女)라고 칭송했다.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용감한 장부라고?”…섭정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섭정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용감한 장부라며 기리는 이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청(淸)나라 중기의 대표적 문장가인 동성파(桐城派) 유대괴(劉大櫆)는 ‘신시(愼始·시작을 신중히 함)’라는 글에서 섭정을 ‘간인(奸人)’이라고 악평했다. “춘추전국 사이에 일찍이 임협(任俠)을 자처한 간인이 있었으니, 한때의 감격으로 남을 위해 복수한다며 얼굴 벗기고 창자를 드러내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 말대로 사서에 실린 섭정의 이야기가 과장 없는 실화라면 일반인의 상식과 정리(情理)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다. 섭정의 이야기는 그 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후한 말기의 저명한 문인 채옹(蔡邕)이 지었다는 ‘금조(琴操)’에 실린 내용은 이렇다. 주검(鑄劍) 장인인 섭정의 아버지는 왕명으로 칼을 만들다가 늦어서 죽음을 당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섭정은 훗날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어느 날 산에 오른 그는 우연히 신선을 만나 거문고 연주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명인이 된 그를 왕이 불렀다. 궁중으로 들어간 그는 거문고 속에 감춰둔 칼을 꺼내 왕을 찔러 죽였다.이 이야기는 형가의 친구 고점리(高漸離)가 축(筑·고대 중국의 현악기)에 납덩이를넣어 진시황에게 접근해 암살하려고 했다는 일화와 유사하다. 어쨌거나 ‘섭정이 한왕을 찌르다(聶政刺韓王)’라는 거문고 악곡이 이때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이 악곡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인 혜강(嵇康)에게로 전해져 ‘광릉산(廣陵散)’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혜강은 사마소(司馬昭)의 미움을 사서 처형될 때 마지막으로 이를 연주하고 나서 명곡의 실전(失傳)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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