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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진휘미   댓글: 0   조회수: 0 날짜: 2025-09-1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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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경북 봉화에 누각과 정자가 유독 많은 건 산세가 빼어난 이유도 있지만, 사화나 당쟁을 피해 숨어든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남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전남 담양 일대에 정자문화를 일군 것과 비교되곤 하는데, 이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 호남의 정자가 ‘고향으로 되돌아간’ 선비들의 낙향(落鄕)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봉화의 경우는 멀고 외진 땅을 찾아서 ‘일부러 알라딘다운로드
숨어든’ 이들의 은거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봉화 일대는 예로부터 ‘천하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었다. 십승지란 조선 시대에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다는 10여 곳의 피난처를 말한다. 난리 통에도 능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곳. 봉화의 춘양 일대가 피난과 보전의 역사로 채워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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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들이 봉화로 몸을 숨겼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형 유운룡과 일가 100명을 피신시킨 곳도,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이 병자호란을 피해 숨어든 곳도,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의 손자 홍석이 난을 피해 은거한 곳도 여기 봉화 땅이었다.
왜 하필 봉화였을까.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비밀문서고인 태백산사고가 바옵토매직 주식
로 봉화에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실록이 전주 사고본만 남고 다 불타버린 뒤, 선조는 다시 만든 조선왕조실록을 더 깊이 숨기라고 명했다. 그래서 ‘더 깊은 곳’으로 찾아낸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 봉화였던 것이다. 봉화는 조선왕조실록을 은밀하게 숨겨둔 곳이 됐고, 혼돈의 세상에서 피난처를 찾던 이들의 표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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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건축적 미감을 보여주는 법전마을의 정자 경체정.
# 삼형제 기린 정자에 추사 글씨가…
봉화군 법전면 법전마을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이들은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화친에 반대하며 외지고 깊은 땅을 찾아 이주해왔다. 세상에 등을백광산업 주식
돌려 이곳으로 찾아들었지만 후손 중에서는 급제자가 줄줄이 나왔다. 특히 부자(父子) 참판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참판은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 벼슬. 영남지방에서는 참판이 귀해 ‘한양의 정승’급쯤으로 대접해준다. 영남에서 부자 참판을 배출한 가문은 딱 둘밖에 없다. 여기 법전 진주 강씨 가문과 닭실마을 안동 권씨 권벌 가문이다.
법전마을에는 단아하고 세련된 미감의 정자 경체정(景체亭)이 있다. 정자는 강씨 삼형제의 덕행과 우애를 기린다. 형제가 모두 예조좌랑, 첨지중추부사, 가의대부 등 내로라하는 벼슬을 지냈다. 정자가 지어진 건 철종 때인 1858년. 아들도, 손주도 아닌 증손자인 강태중이 정자를 지었다. 3대(代)의 조상을 잊지 않는 증손자의 마음, 그리고 높은 벼슬을 한 증조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새겨진 정자다.
정자의 현판은 모두 네 개. 정자 정면의 예서체로 쓴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라는데 모사본이다. 원본은 도난당하고 없다. 태백산사고를 시찰하러 왔던 추사가 법전 강씨 집성촌 고택에 머물렀다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글씨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왼쪽 해서체 글씨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글씨다.
법전에는 경체정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한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이오당(二吾堂)이다. 경체정보다 200년쯤 앞서 지어졌으니 건축양식은 여기가 원조라 할 수 있겠다. 이오당이란 이름은 ‘낙오천(樂吾天) 종오년(終吾年)’에서 가져다 쓴 것. ‘자연을 즐기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마루 밑에 숨긴 굴뚝이 인상적이다.
구천리의 정자 야옹정. 마루가 넓은 건, 풍류를 즐기기보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는 증거다.
# 자연의 미감으로 읽는 정자
상운면 구천리의 야옹정(野翁亭)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낙향한 할아버지의 ‘벼슬길에 연연하지 말라’는 유훈을 받든 손주 전응방이 지은 정자다. 진사에 급제했지만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 야인으로 지낸 전응방이 산수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가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야옹정 자리다. 야옹정은 옥천 전씨 종택의 담장 안에 있다. 정자로 들어서는 문은 잠가놓았지만, 비어있는 종택의 문은 항상 열어두고 있으니 그쪽으로 돌아들어 가면 된다. 담밖에는 제법 큰 연못도 있다. 사람 사는 온기가 사라진 고택과 정자는 쇠락해가는 듯하지만, 기품만큼은 아직 살아있다.
봉화읍 거촌리 황전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도암정(陶巖亭)은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으로 눈길을 붙잡는 정자다. 정자 앞에는 초록 연잎이 가득한 연못을 두고 있고 옆에는 아름드리 노거수 여러 그루와 독특한 모양의 바위가 조화롭다. 일부러 조경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근사하다.
눈길이 가는 건 둥근 모양의 큰 바위다. 도암이란 이름은 이 바위가 마치 항아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 항아리로 지목된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陶巖洞(도암동)’이라 새겼다. 그 곁의 두 개 바위까지 합쳐 ‘독바위’라 불렀는데, 주민들은 각각 쌀독, 술독, 돈독으로 부르는 바위가 마을의 번영을 가져온다고 믿었단다.
# 로맨스를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고택
물야면에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성이성이 살았던 계서당종택이 있다. 고택 중에서 유일하게 로맨스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었다는 단서는 여럿이다. 우선 성이성은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아버지를 따라 춘향전의 배경인 남원에 살았다. 1637년에 암행어사로 파견돼 호남 지방을 순찰했으며, 1639년과 1647년에도 암행어사로 등용됐다.
쉰세 살 때 성이성이 남원 광한루를 방문한 사실이 후손이 지은 ‘호남암행록’에 나온다. ‘광한루에 찾아가니 늙은 기생 여진과 늙은 서리 강경남이 마중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함께 눈 내리는 광한루 난간에 앉았다.’ 여기서 성이성은 소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글을 남긴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소년 시절을 회상하고는 /밤늦도록 능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봉화에는 또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이 모였고, 일제강점기 프랑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가 작성되기도 했던 만회고택이 있다. 바래미 마을의 만회고택은 이른바 ‘시험 기운’이 좋기로 이름났다. 14대에 걸쳐 진사 열둘에 대과 급제자만 여섯을 배출한 전무후무한 기록 덕이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게 손바닥만 한 바래미 마을에서 독립운동가 14명이 나왔다는 기록이다.
# 가을 산이 병을 치료한다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 500여 년 전에 명나라 사람 정선(鄭瑄)이 쓴 ‘작비암일찬(昨非庵日纂)’이란 책이 있다. 옛사람이 남긴 훌륭한 말이나 본받을 만한 행실에 대한 글을 뽑아내서 편집한 책이다. 필사본이 조선까지 나돌 정도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글로벌 베스트셀러’다.
그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가을 산이 능히 병객(病客)을 치료한다.” 기꺼이 동감하는 바다. 다른 계절의 산도 그렇지만, 가을 산이야말로 병들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다고 믿는다.
경북 봉화에 딱 그런 가을 산이 있다. 청량산이다. ‘청량(淸凉)’이란 이름부터가 ‘맑고 서늘하다’는 뜻이니 이름에도 가을이 스며있다. 지난주에 이어서 봉화의 누각과 정자를 말하는 중이었으니, 등산과 관련해서는 딱 한 문장만 끼워 넣기로 한다. ‘짧게는 1시간부터 길게는 9시간까지. 청량산에는 모두 6개 산행 코스가 있는데, 이즈음이면 어떤 코스를 택하든 맑고 서늘한 가을을 만끽하고 올 수 있다.’ 뭐 이 정도까지만.
청량산 얘기를 꺼낸 건 산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누각이 있어서다. 밀성루(密城樓). 애초에 있었던 걸 고쳐 지은 게 아니라 2008년에 신축(新築)했다. 세월의 푸른 이끼로 가득한 ‘봉화 누정’의 반열에 갓 지은 새 누각을 끼워 넣는 게 영 어색하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도 밀성루를 추천 목록에 넣기로 한 건 누각이 들어선 자리에 두툼한 역사가 스며있고, 주위 경관도 빼어나서다.
추천하는 이유가 또 있다. 산중의 누각인 밀성루까지는 30분이면 가닿을 수 있다. 청량산 산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누각에 올라서면 장쾌한 청량산의 전경(全景)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수직의 벼랑 밀성대 위에 세운 누각 밀성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이 군사훈련을 시키며 군령을 어긴 병사들을 여기서 밀어 떨어뜨렸다고 전한다.
# 불복한 이들을 떠밀었던 자리
청량산의 산군(山群)은 남과 북으로 분명하게 나뉜다. 그 사이로 협곡이 있고, 협곡에 놓인 길이 산을 잘라놓기 때문이다. 청량산 산행의 중심은 북쪽이다. 청량사며 응진전이 북쪽에 있고, 청량산을 대표하는 자란봉이며 금탑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향로봉 등이 죄다 북쪽에 몰려 있다. 청량산에는 열두 개 봉우리가 있는데, 열한 개가 북쪽에 있다. 남쪽에는 축융봉 하나가 홀로 솟아있을 따름이다.
밀성루는 축융봉 중턱쯤의 산성 위에 올려져 있다. 이쪽의 산성을 ‘공민왕 산성’이라 부른다. 고려 공민왕의 주도로 고쳐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지금의 복주(福州)로 몽진했다. 몽진(蒙塵).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왕이 난리를 피해 피난하는 걸 그렇게 에둘러 말했다. 복주는 지금의 안동이다. 공민왕은 안동 근처 청량산에 성을 쌓았다. 홍건적이 여기까지 밀고 내려오면 험준한 산세와 계곡을 이용해 쌓은 산성 안으로 들어가서 결전을 벌일 요량이었다. 공민왕은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축융봉 중턱에 성곽이 깎아지른 벼랑을 지나가는 구간이 있다. 그곳을 밀성대라 불렀다. 밀성(密城)이라니 ‘비밀스러운 성곽’이란 뜻인가 싶었는데, 뜻이 아니라 발음, 그러니까 음독(音讀)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공민왕이 군령을 어기거나 명령에 불복하는 군졸들을 여기서 절벽 아래로 밀어 처형했다는 얘기. 이곳에서 ‘밀었다’고 해서 이름이 밀성대가 됐다는 얘기다. 그곳에서 기강 세우기에 안간힘을 썼을 왕보다 아슬아슬한 벼랑에서 떠밀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을 때, 고통받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건 늘 ‘아랫사람’이었다.
# 없던 누각을 새로 지은 이유는
누각 밀성루는 성곽이 길게 밀고 나온 아찔한 벼랑을 딛고 올라서 있다. 산성 성곽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밀성루를 지었는데, 없던 누각을 거기 새로 세운 이유는 전적으로 빼어난 전망 때문이었으리라.
밀성루에 오르면 등 뒤의 축융봉을 빼고 청량산의 열한 개 봉우리를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다. 금탑봉 아래 응진전의 모습이 먹으로 찍어 그린 수묵화처럼 펼쳐지고, 근육질의 기암으로 이뤄진 암봉과 명물로 꼽히는 ‘하늘다리’도 볼 수 있다.
산행 들머리부터 가파른 벼랑인 청량산은, 가까이 가면 외려 잘 안 보인다. 살짝 뒤로 물러난 뒤에야 청량산의 산세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밀성루는 축융봉과 함께 ‘청량산 최고 전망대’로 꼽을 만하다.
사실 ‘성벽 위의 누각’이 좀 뜬금없긴 하다. 하지만 가보면 누각을 지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밀성대에서 마주하는 청량산의 파노라마 경관이 ‘거기 무엇인가를 세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쉽게 짐작돼서다. 무언가를 세운다는 건, 거기에 사람들을 붙들어두고 싶다는 의미. 밀성루를 지은 뜻에는, 가장 전망이 좋은 이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이 청량산의 장쾌하고 빼어난 경관을 보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영동선의 임기역. 현역 기차역이지만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됐다.
# 숲터 마을 기차역에서 커피를 판다
이번에는 정자나 누각 얘긴 아니고, 현대판 마을 정자 엇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봉화의 외딴 산골 마을 기차역 얘기다.
경북 영주에서 출발해 봉화역과 춘양역을 지난 영동선 열차는, 백두대간의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임기역에서 쉬었다 간다.
임기역은 소천면 임기2리 마을 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다. ‘수풀 림(林)’에 ‘터 기(基)’를 쓰니 임기(林基)는 ‘숲터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 있었다는 ‘작은 숲(小林)’과 ‘큰 숲(大林)’을 한데 묶어 ‘숲터’라 부르다 마을 이름이 임기가 됐다는 얘기.
임기역은 역무원 없는 작은 간이역이다. 한때 쉴새 없이 무연탄과 금강송을 내륙으로 실어나르며 마을 전체가 흥청거렸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동대구∼동해 구간과 영주∼동해 구간을 운행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각각 갈 때 한 번, 올 때 한 번 임기역에 선다.
임기역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은 어쩌다 한 명. 하루 평균 승하차 인원은 ‘0명’으로 수렴한다. 이랬던 임기역이 한 달 전쯤 카페가 됐다. 정부의 지원 사업으로 마을 주민들이 기차역을 카페로 바꿔놓은 것이다. 역사 대합실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고, 차표를 팔던 역무실 공간에는 커피 머신을 들여놓고 주방을 만들었다. 카페의 상호는 ‘임기역’. 상호를 따로 짓지 않고 역에 달린 역명 간판을 그냥 쓴다.
여기는 다른 카페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우선 수익이 목적이 아니다. 마을 주민들이 심심하면 모이고, 더러 외지인이 섞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영업장이라기보다 ‘현대판 정자’에 가깝다. 주민들의 평균연령은 74세. 100가구 남짓의 쇠락한 산골 마을에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없을 정도니까 ‘상권’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민망한 곳이다. 돈 벌기가 목적이었다면 이런 곳에서 카페는, 아예 열지 말았어야 했다.
# 찻값 대신 기부를 받는 이유
주민들은 애초에 임기역을 마을도서관 혹은 쉼터로 꾸미려고 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카페를 내고 장사를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앞치마를 하고 카페를 지키고 있던 남원기(67) 임기2리 이장의 설명이 이렇다. “단순한 주민 휴게공간으로 조성하려 했다가 지역의 활력을 위해서는 마을 주민과 외지인이 함께 이용하는 카페가 더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바꿨습니다.”
모르긴 해도 카페를 차려서 얻고 싶었던 건 돈보다는 ‘외지인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단언컨대 임기리에는 여행자들의 대중적 관심을 끌만 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카페를 차린 건, 많든 적든 여기까지 들어온 이들에게 마을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외지인의 시선이야말로 마을 가꾸기의 훌륭한 ‘이유 혹은 구실’이다. ‘우리끼리’ 보고 즐기는 거라면 대충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이걸 보여준다는 전제가 있으면 좀 더 잘 가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외부의 시선은 내부를 자극하고 격려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 이장은 “외지 손님이 많지 않아도 카페를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고 했다.
임기역 카페에서는 찻값을 내는 게 아니라 ‘기부’를 한다. 현금이나 신용카드로는 받지 않고, 계좌 입금이나 모바일메신저 송금으로만 받는다. 남 이장은 “찻값을 정해놓지 않았는데, 그게 부담스럽다는 이들이 많아서 대략의 가이드라인은 정해두었다”고 했다. 차를 마시고 나가면서 기부금을 입금했는데, 남 이장은 건성으로 말을 받는다. 얼마를 넣었는지, 진짜 넣기는 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걸 보지 않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라고 했지만, 실은 손님에게 돈 받고 차를 파는 게 못내 민망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임기 3리 메밀꽃은 사라지고 없지만
카페가 된 임기역은 봉화에서 영양 가는 길에 있다. 봉화를 지나서 만나는 31번 국도는 울진 방면과 영양 방면으로 갈라지는데, 거기서 영양 쪽으로 방향을 잡아 차로 5분만 가면 임기역이 있다. 봉화에서 영양 가는 길은 오지 중의 오지다. 봉화만 해도 첩첩산중인데, 영양은 그보다 더 깊다. 그러니 이쪽 길은 웬만해서는 갈 일이 없다.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적막한 자연을 만나고 싶다면 권할 만한 길이다.
한때 임기리에는 내로라하는 명소가 있었다. 15년 앞뒤쯤의 얘기다. 낙동강 상류의 물길을 끼고 있는 임기3리 산촌의 밭에 주민들이 메밀을 심어 거뒀는데, 해마다 이맘때면 강변의 비탈진 밭에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시절 소천초등학교 임기분교장에서 임기3리 마을회관을 지나 현동역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은 초가을 메밀꽃밭 사이를 달리는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였다.
다시 가본 강변 마을에 메밀꽃은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다. 비록 메밀꽃은 없지만 적요한 산촌 마을의 가을 풍경은 근사했다. 사과밭에는 사과가 붉게 익어가고 있고, 초록의 배추밭이 거대한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주렁주렁 붉은 고추가 열린 밭에서는 수확이 한창이었다.
메밀꽃처럼 인상적인 ‘딱 하나’가 없어 좀 밋밋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 하지만 선명하고 원색적 욕망의 여행을 하는 때도 있지만, 저자극의 순한 여행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 임기3리 강변 마을과 임기 2리의 임기역 카페는 서로를 보완한다. 느슨하면서도 아름다운 강변 마을 풍경이 임기역 카페를 찾아가는 충분한 구실이나 이유가 될 수 있겠다는 얘기다. 반대로 소박한 마을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임기역 카페가, 강변 마을의 순한 가을 풍경을 찾아가는 핑계가 될 수도 있겠고….
■ 임기역이 북적였던 시절
임기역은 영동선으로 통합된 철도 노선인 ‘영암선(영주∼철암)’의 역이다. 월출산이 있는 전남 영암을 떠올리기 쉽지만, 영주에서 ‘영’ 자를, 철암에서 ‘암’ 자를 따서 영암선이다. 영암선은 삼척탄좌에서 캐낸 무연탄을 실어나르기 위해 1956년 험준한 백두대간에다 놓은 산업철도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선은 산업의 중추였다. 차가 드물던 그 시절에는 번성의 중심이 기차역이었다. 리(里) 단위 행정구역이었음에도 임기마을이 흥청거렸던 이유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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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경북 봉화에 누각과 정자가 유독 많은 건 산세가 빼어난 이유도 있지만, 사화나 당쟁을 피해 숨어든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남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전남 담양 일대에 정자문화를 일군 것과 비교되곤 하는데, 이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 호남의 정자가 ‘고향으로 되돌아간’ 선비들의 낙향(落鄕)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봉화의 경우는 멀고 외진 땅을 찾아서 ‘일부러 알라딘다운로드
숨어든’ 이들의 은거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봉화 일대는 예로부터 ‘천하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었다. 십승지란 조선 시대에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다는 10여 곳의 피난처를 말한다. 난리 통에도 능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곳. 봉화의 춘양 일대가 피난과 보전의 역사로 채워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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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들이 봉화로 몸을 숨겼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형 유운룡과 일가 100명을 피신시킨 곳도,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이 병자호란을 피해 숨어든 곳도,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의 손자 홍석이 난을 피해 은거한 곳도 여기 봉화 땅이었다.
왜 하필 봉화였을까.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비밀문서고인 태백산사고가 바옵토매직 주식
로 봉화에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실록이 전주 사고본만 남고 다 불타버린 뒤, 선조는 다시 만든 조선왕조실록을 더 깊이 숨기라고 명했다. 그래서 ‘더 깊은 곳’으로 찾아낸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 봉화였던 것이다. 봉화는 조선왕조실록을 은밀하게 숨겨둔 곳이 됐고, 혼돈의 세상에서 피난처를 찾던 이들의 표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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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건축적 미감을 보여주는 법전마을의 정자 경체정.
# 삼형제 기린 정자에 추사 글씨가…
봉화군 법전면 법전마을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이들은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화친에 반대하며 외지고 깊은 땅을 찾아 이주해왔다. 세상에 등을백광산업 주식
돌려 이곳으로 찾아들었지만 후손 중에서는 급제자가 줄줄이 나왔다. 특히 부자(父子) 참판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참판은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 벼슬. 영남지방에서는 참판이 귀해 ‘한양의 정승’급쯤으로 대접해준다. 영남에서 부자 참판을 배출한 가문은 딱 둘밖에 없다. 여기 법전 진주 강씨 가문과 닭실마을 안동 권씨 권벌 가문이다.
법전마을에는 단아하고 세련된 미감의 정자 경체정(景체亭)이 있다. 정자는 강씨 삼형제의 덕행과 우애를 기린다. 형제가 모두 예조좌랑, 첨지중추부사, 가의대부 등 내로라하는 벼슬을 지냈다. 정자가 지어진 건 철종 때인 1858년. 아들도, 손주도 아닌 증손자인 강태중이 정자를 지었다. 3대(代)의 조상을 잊지 않는 증손자의 마음, 그리고 높은 벼슬을 한 증조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새겨진 정자다.
정자의 현판은 모두 네 개. 정자 정면의 예서체로 쓴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라는데 모사본이다. 원본은 도난당하고 없다. 태백산사고를 시찰하러 왔던 추사가 법전 강씨 집성촌 고택에 머물렀다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글씨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왼쪽 해서체 글씨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글씨다.
법전에는 경체정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한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이오당(二吾堂)이다. 경체정보다 200년쯤 앞서 지어졌으니 건축양식은 여기가 원조라 할 수 있겠다. 이오당이란 이름은 ‘낙오천(樂吾天) 종오년(終吾年)’에서 가져다 쓴 것. ‘자연을 즐기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뜻이다. 마루 밑에 숨긴 굴뚝이 인상적이다.
구천리의 정자 야옹정. 마루가 넓은 건, 풍류를 즐기기보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는 증거다.
# 자연의 미감으로 읽는 정자
상운면 구천리의 야옹정(野翁亭)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낙향한 할아버지의 ‘벼슬길에 연연하지 말라’는 유훈을 받든 손주 전응방이 지은 정자다. 진사에 급제했지만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 야인으로 지낸 전응방이 산수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가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야옹정 자리다. 야옹정은 옥천 전씨 종택의 담장 안에 있다. 정자로 들어서는 문은 잠가놓았지만, 비어있는 종택의 문은 항상 열어두고 있으니 그쪽으로 돌아들어 가면 된다. 담밖에는 제법 큰 연못도 있다. 사람 사는 온기가 사라진 고택과 정자는 쇠락해가는 듯하지만, 기품만큼은 아직 살아있다.
봉화읍 거촌리 황전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도암정(陶巖亭)은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으로 눈길을 붙잡는 정자다. 정자 앞에는 초록 연잎이 가득한 연못을 두고 있고 옆에는 아름드리 노거수 여러 그루와 독특한 모양의 바위가 조화롭다. 일부러 조경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근사하다.
눈길이 가는 건 둥근 모양의 큰 바위다. 도암이란 이름은 이 바위가 마치 항아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 항아리로 지목된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陶巖洞(도암동)’이라 새겼다. 그 곁의 두 개 바위까지 합쳐 ‘독바위’라 불렀는데, 주민들은 각각 쌀독, 술독, 돈독으로 부르는 바위가 마을의 번영을 가져온다고 믿었단다.
# 로맨스를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고택
물야면에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성이성이 살았던 계서당종택이 있다. 고택 중에서 유일하게 로맨스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었다는 단서는 여럿이다. 우선 성이성은 열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아버지를 따라 춘향전의 배경인 남원에 살았다. 1637년에 암행어사로 파견돼 호남 지방을 순찰했으며, 1639년과 1647년에도 암행어사로 등용됐다.
쉰세 살 때 성이성이 남원 광한루를 방문한 사실이 후손이 지은 ‘호남암행록’에 나온다. ‘광한루에 찾아가니 늙은 기생 여진과 늙은 서리 강경남이 마중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함께 눈 내리는 광한루 난간에 앉았다.’ 여기서 성이성은 소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글을 남긴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소년 시절을 회상하고는 /밤늦도록 능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봉화에는 또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이 모였고, 일제강점기 프랑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가 작성되기도 했던 만회고택이 있다. 바래미 마을의 만회고택은 이른바 ‘시험 기운’이 좋기로 이름났다. 14대에 걸쳐 진사 열둘에 대과 급제자만 여섯을 배출한 전무후무한 기록 덕이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게 손바닥만 한 바래미 마을에서 독립운동가 14명이 나왔다는 기록이다.
# 가을 산이 병을 치료한다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 500여 년 전에 명나라 사람 정선(鄭瑄)이 쓴 ‘작비암일찬(昨非庵日纂)’이란 책이 있다. 옛사람이 남긴 훌륭한 말이나 본받을 만한 행실에 대한 글을 뽑아내서 편집한 책이다. 필사본이 조선까지 나돌 정도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글로벌 베스트셀러’다.
그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가을 산이 능히 병객(病客)을 치료한다.” 기꺼이 동감하는 바다. 다른 계절의 산도 그렇지만, 가을 산이야말로 병들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다고 믿는다.
경북 봉화에 딱 그런 가을 산이 있다. 청량산이다. ‘청량(淸凉)’이란 이름부터가 ‘맑고 서늘하다’는 뜻이니 이름에도 가을이 스며있다. 지난주에 이어서 봉화의 누각과 정자를 말하는 중이었으니, 등산과 관련해서는 딱 한 문장만 끼워 넣기로 한다. ‘짧게는 1시간부터 길게는 9시간까지. 청량산에는 모두 6개 산행 코스가 있는데, 이즈음이면 어떤 코스를 택하든 맑고 서늘한 가을을 만끽하고 올 수 있다.’ 뭐 이 정도까지만.
청량산 얘기를 꺼낸 건 산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누각이 있어서다. 밀성루(密城樓). 애초에 있었던 걸 고쳐 지은 게 아니라 2008년에 신축(新築)했다. 세월의 푸른 이끼로 가득한 ‘봉화 누정’의 반열에 갓 지은 새 누각을 끼워 넣는 게 영 어색하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도 밀성루를 추천 목록에 넣기로 한 건 누각이 들어선 자리에 두툼한 역사가 스며있고, 주위 경관도 빼어나서다.
추천하는 이유가 또 있다. 산중의 누각인 밀성루까지는 30분이면 가닿을 수 있다. 청량산 산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누각에 올라서면 장쾌한 청량산의 전경(全景)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수직의 벼랑 밀성대 위에 세운 누각 밀성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이 군사훈련을 시키며 군령을 어긴 병사들을 여기서 밀어 떨어뜨렸다고 전한다.
# 불복한 이들을 떠밀었던 자리
청량산의 산군(山群)은 남과 북으로 분명하게 나뉜다. 그 사이로 협곡이 있고, 협곡에 놓인 길이 산을 잘라놓기 때문이다. 청량산 산행의 중심은 북쪽이다. 청량사며 응진전이 북쪽에 있고, 청량산을 대표하는 자란봉이며 금탑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향로봉 등이 죄다 북쪽에 몰려 있다. 청량산에는 열두 개 봉우리가 있는데, 열한 개가 북쪽에 있다. 남쪽에는 축융봉 하나가 홀로 솟아있을 따름이다.
밀성루는 축융봉 중턱쯤의 산성 위에 올려져 있다. 이쪽의 산성을 ‘공민왕 산성’이라 부른다. 고려 공민왕의 주도로 고쳐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지금의 복주(福州)로 몽진했다. 몽진(蒙塵).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왕이 난리를 피해 피난하는 걸 그렇게 에둘러 말했다. 복주는 지금의 안동이다. 공민왕은 안동 근처 청량산에 성을 쌓았다. 홍건적이 여기까지 밀고 내려오면 험준한 산세와 계곡을 이용해 쌓은 산성 안으로 들어가서 결전을 벌일 요량이었다. 공민왕은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축융봉 중턱에 성곽이 깎아지른 벼랑을 지나가는 구간이 있다. 그곳을 밀성대라 불렀다. 밀성(密城)이라니 ‘비밀스러운 성곽’이란 뜻인가 싶었는데, 뜻이 아니라 발음, 그러니까 음독(音讀)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공민왕이 군령을 어기거나 명령에 불복하는 군졸들을 여기서 절벽 아래로 밀어 처형했다는 얘기. 이곳에서 ‘밀었다’고 해서 이름이 밀성대가 됐다는 얘기다. 그곳에서 기강 세우기에 안간힘을 썼을 왕보다 아슬아슬한 벼랑에서 떠밀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을 때, 고통받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건 늘 ‘아랫사람’이었다.
# 없던 누각을 새로 지은 이유는
누각 밀성루는 성곽이 길게 밀고 나온 아찔한 벼랑을 딛고 올라서 있다. 산성 성곽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밀성루를 지었는데, 없던 누각을 거기 새로 세운 이유는 전적으로 빼어난 전망 때문이었으리라.
밀성루에 오르면 등 뒤의 축융봉을 빼고 청량산의 열한 개 봉우리를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다. 금탑봉 아래 응진전의 모습이 먹으로 찍어 그린 수묵화처럼 펼쳐지고, 근육질의 기암으로 이뤄진 암봉과 명물로 꼽히는 ‘하늘다리’도 볼 수 있다.
산행 들머리부터 가파른 벼랑인 청량산은, 가까이 가면 외려 잘 안 보인다. 살짝 뒤로 물러난 뒤에야 청량산의 산세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밀성루는 축융봉과 함께 ‘청량산 최고 전망대’로 꼽을 만하다.
사실 ‘성벽 위의 누각’이 좀 뜬금없긴 하다. 하지만 가보면 누각을 지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밀성대에서 마주하는 청량산의 파노라마 경관이 ‘거기 무엇인가를 세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쉽게 짐작돼서다. 무언가를 세운다는 건, 거기에 사람들을 붙들어두고 싶다는 의미. 밀성루를 지은 뜻에는, 가장 전망이 좋은 이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이 청량산의 장쾌하고 빼어난 경관을 보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영동선의 임기역. 현역 기차역이지만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됐다.
# 숲터 마을 기차역에서 커피를 판다
이번에는 정자나 누각 얘긴 아니고, 현대판 마을 정자 엇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봉화의 외딴 산골 마을 기차역 얘기다.
경북 영주에서 출발해 봉화역과 춘양역을 지난 영동선 열차는, 백두대간의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임기역에서 쉬었다 간다.
임기역은 소천면 임기2리 마을 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다. ‘수풀 림(林)’에 ‘터 기(基)’를 쓰니 임기(林基)는 ‘숲터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 있었다는 ‘작은 숲(小林)’과 ‘큰 숲(大林)’을 한데 묶어 ‘숲터’라 부르다 마을 이름이 임기가 됐다는 얘기.
임기역은 역무원 없는 작은 간이역이다. 한때 쉴새 없이 무연탄과 금강송을 내륙으로 실어나르며 마을 전체가 흥청거렸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동대구∼동해 구간과 영주∼동해 구간을 운행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각각 갈 때 한 번, 올 때 한 번 임기역에 선다.
임기역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은 어쩌다 한 명. 하루 평균 승하차 인원은 ‘0명’으로 수렴한다. 이랬던 임기역이 한 달 전쯤 카페가 됐다. 정부의 지원 사업으로 마을 주민들이 기차역을 카페로 바꿔놓은 것이다. 역사 대합실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고, 차표를 팔던 역무실 공간에는 커피 머신을 들여놓고 주방을 만들었다. 카페의 상호는 ‘임기역’. 상호를 따로 짓지 않고 역에 달린 역명 간판을 그냥 쓴다.
여기는 다른 카페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우선 수익이 목적이 아니다. 마을 주민들이 심심하면 모이고, 더러 외지인이 섞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영업장이라기보다 ‘현대판 정자’에 가깝다. 주민들의 평균연령은 74세. 100가구 남짓의 쇠락한 산골 마을에 변변한 구멍가게 하나 없을 정도니까 ‘상권’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민망한 곳이다. 돈 벌기가 목적이었다면 이런 곳에서 카페는, 아예 열지 말았어야 했다.
# 찻값 대신 기부를 받는 이유
주민들은 애초에 임기역을 마을도서관 혹은 쉼터로 꾸미려고 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카페를 내고 장사를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앞치마를 하고 카페를 지키고 있던 남원기(67) 임기2리 이장의 설명이 이렇다. “단순한 주민 휴게공간으로 조성하려 했다가 지역의 활력을 위해서는 마을 주민과 외지인이 함께 이용하는 카페가 더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바꿨습니다.”
모르긴 해도 카페를 차려서 얻고 싶었던 건 돈보다는 ‘외지인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단언컨대 임기리에는 여행자들의 대중적 관심을 끌만 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카페를 차린 건, 많든 적든 여기까지 들어온 이들에게 마을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외지인의 시선이야말로 마을 가꾸기의 훌륭한 ‘이유 혹은 구실’이다. ‘우리끼리’ 보고 즐기는 거라면 대충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이걸 보여준다는 전제가 있으면 좀 더 잘 가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외부의 시선은 내부를 자극하고 격려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 이장은 “외지 손님이 많지 않아도 카페를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고 했다.
임기역 카페에서는 찻값을 내는 게 아니라 ‘기부’를 한다. 현금이나 신용카드로는 받지 않고, 계좌 입금이나 모바일메신저 송금으로만 받는다. 남 이장은 “찻값을 정해놓지 않았는데, 그게 부담스럽다는 이들이 많아서 대략의 가이드라인은 정해두었다”고 했다. 차를 마시고 나가면서 기부금을 입금했는데, 남 이장은 건성으로 말을 받는다. 얼마를 넣었는지, 진짜 넣기는 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걸 보지 않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라고 했지만, 실은 손님에게 돈 받고 차를 파는 게 못내 민망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임기 3리 메밀꽃은 사라지고 없지만
카페가 된 임기역은 봉화에서 영양 가는 길에 있다. 봉화를 지나서 만나는 31번 국도는 울진 방면과 영양 방면으로 갈라지는데, 거기서 영양 쪽으로 방향을 잡아 차로 5분만 가면 임기역이 있다. 봉화에서 영양 가는 길은 오지 중의 오지다. 봉화만 해도 첩첩산중인데, 영양은 그보다 더 깊다. 그러니 이쪽 길은 웬만해서는 갈 일이 없다.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적막한 자연을 만나고 싶다면 권할 만한 길이다.
한때 임기리에는 내로라하는 명소가 있었다. 15년 앞뒤쯤의 얘기다. 낙동강 상류의 물길을 끼고 있는 임기3리 산촌의 밭에 주민들이 메밀을 심어 거뒀는데, 해마다 이맘때면 강변의 비탈진 밭에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시절 소천초등학교 임기분교장에서 임기3리 마을회관을 지나 현동역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은 초가을 메밀꽃밭 사이를 달리는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였다.
다시 가본 강변 마을에 메밀꽃은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다. 비록 메밀꽃은 없지만 적요한 산촌 마을의 가을 풍경은 근사했다. 사과밭에는 사과가 붉게 익어가고 있고, 초록의 배추밭이 거대한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주렁주렁 붉은 고추가 열린 밭에서는 수확이 한창이었다.
메밀꽃처럼 인상적인 ‘딱 하나’가 없어 좀 밋밋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 하지만 선명하고 원색적 욕망의 여행을 하는 때도 있지만, 저자극의 순한 여행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 임기3리 강변 마을과 임기 2리의 임기역 카페는 서로를 보완한다. 느슨하면서도 아름다운 강변 마을 풍경이 임기역 카페를 찾아가는 충분한 구실이나 이유가 될 수 있겠다는 얘기다. 반대로 소박한 마을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임기역 카페가, 강변 마을의 순한 가을 풍경을 찾아가는 핑계가 될 수도 있겠고….
■ 임기역이 북적였던 시절
임기역은 영동선으로 통합된 철도 노선인 ‘영암선(영주∼철암)’의 역이다. 월출산이 있는 전남 영암을 떠올리기 쉽지만, 영주에서 ‘영’ 자를, 철암에서 ‘암’ 자를 따서 영암선이다. 영암선은 삼척탄좌에서 캐낸 무연탄을 실어나르기 위해 1956년 험준한 백두대간에다 놓은 산업철도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선은 산업의 중추였다. 차가 드물던 그 시절에는 번성의 중심이 기차역이었다. 리(里) 단위 행정구역이었음에도 임기마을이 흥청거렸던 이유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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