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스무 살에 깨달은 지혜라는 건 정말 보잘것없었다. 외로워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에 외로운 거다. 외로워서 시를 쓰고 책을 읽었던 걸까? 젊은 날엔 아르튀르 랭보 시집, 손창섭과 오영수의 단편들, 김우창과 김현의 평론집, 신구문화사판 <전후세계문학전집>에 실린 잭 케루악이나 다자이 오사무 소설에 빠졌다. 문학에 미쳐 있었으니 미래의 생업 따위엔 관심을 두지 못했다. 가끔 사기꾼이나 건달로 한 생애를 다 써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곤 했지만 구제품 양복을 걸친 청년의 머릿 속엔 문학으로 그득 차 있을 뿐. 그런 청년에게 현실을 바로 보라는 요구는 쇠귀에 경 읽기 같은 짓이었을 테다.
청계천 헌책방서 만난 희귀본
좋은 시를 쓰고 싶었지만 만만치 않았다. 시의 첫 행을 쓰고 실망해서 격분하기 일쑤였다. 이따위를 쓰려면 그만둬! 나는 어쩌다 안락한 삶을 구하는 대신 페르시아 시인 루미같이 시를 쓰고 싶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꾸 시에서 도망쳤지만 시립도서관에 나가 책을 읽고 시 몇 줄 쓰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시립도서관 휴무일엔 짬을 내서 종로의 ‘르네상스’에서 고전음악을 듣거나 헌책방 순례에 나섰다. 서촌 구석진 곳의 헌책방이나 신촌 대학가의 헌책방, 경희대 인근 헌책방까지 돌아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자주 찾던 곳은 청계천 헌책방거리다. 청계천에서 동대문 너머까지 대로변에는 헌책방 수백 군데가 밀집해 있었는데, 그 헌책방들 서가를 매의 눈으로 훑어보고 절판된 희귀본을 찾아내는 게 내 일이었다. 작가나 교수가 작고한 뒤 유족이 고인의 진귀한 책을 쏟아낼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노다지를 만난 듯 심장이 쿵쿵거렸다.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김현의 첫 평론집 <존재와 언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김영태·마종기·황동규 3인 시집 <평균율 1> <평균율 2> 같은 희귀 초판본을 찾았을 때 큰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초겨울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성글게 내리던 눈이 정오가 지나자 눈보라로 변했다. 거리는 이상한 정적에 감싸인 채 금세 눈으로 덮였다. 행인의 외투 어깨와 가 로수에도 눈이 내려 쌓이는데, 차들은 속도를 늦춘 채 느릿느릿 움직였다.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눈보라를 뚫고서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돌았다. 이른 어둠이 거리에 깔릴 무렵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어머니의 얼갈이배추 된장국 맛
나는 헌책방에서 구한 책으로 불룩해진 가방을 메고 기진맥진한 채로 귀가했다. 점심을 굶어 허기가 졌다. 종일 눈 쌓인 데를 돌아다닌 탓에 구두는 젖은 채이고 발가락은 시렸다. 집 안에 들어서자 다정한 온기와 얼갈이배추 된장국 냄새가 가득하고, 내실 유리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얼갈이배추 된장국을 끓이신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얼갈이배추 된장국을 끓이는 비법을 따로 갖고 계신 듯했다. 어머니가 끓인 국에 들어간 것은 얼갈이배추와 집에서 담근 된장과 굵은 멸치 한 줌, 다진 마늘이 다였다. 어머니, 나의 천사, 당신의 탄식과 열매와 즙을 넣어 끓인 된장국 한 그릇을 바보 아들이 겸손하게 받아 든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얼갈이배추 된장국을 뜨는데 자꾸 웃음이 나와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것은 멍청이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도 살 만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얼갈이배추는 섬유질이 풍부한데 푹 익으면 달큰한 맛을 냈다. 나는 한 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을 더 먹었다. 따뜻한 된장국이 들어가자 언 몸이 녹으며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누가 내게 심장과 폐와 위장 같은 걸 주었을까?
혼절한 듯이 자고 깨어난 이튿날 아침, 세상은 밤새 내린 폭설에 덮여 있었다. 그날 아침 세상은 고요하고 내 영혼은 물속처럼 차분했다. 나는 시인이 될 거야,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로부터 4년이 지난 뒤에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가 당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격류 같은 세월 속에서 시집 여러 권을 썼으나 배롱나무 몇 주가 서 있는 시골 땅 200평을 사서 집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 수련이나 관상하며 딸 둘이나 낳아 잘 기르겠다는 꿈은 너무도 무지막지했던 건가. 나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꿈은 붉고 사무치는 법이다.
오늘의 나를 빚은 것은 책과 시…
해마다 장을 담고 간장을 달이던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다. 새벽에 쌀을 씻어 밥을 짓는 어머니의 모습은 꿈에서나 볼 수 있을까? 공장에서 나오는 된장이나 간장을 사다 먹으니 어머니의 얼갈이배추 된장국은 꿈조차 못 꾼다. 문학에 끌려다니느라 가슴에 가득 차 있던 열망과 불안과 순정은 탕진됐다. 나를 열광시켰던 젊은 날의 시가 주던 온기도 예전과는 다르다. 나는 천천히 죽어간다. 나는 골수가 없는 뼈, 타버린 촛불이다. 아니, 나는 시의 변심한 애인이다. 아니다. 아마도 냉정한 시가 나를 버렸을 테다. 시와는 끝장났으니 이제 시를 둘러싼 예견과 탐닉들, 구애 따위는 필요가 없다.
청년은 방황을 하며 세월을 탕진하다가 노인이 되는가? 이보다 더 분명한 진리는 없다. 늙어버린 사람의 가슴속 찬란한 꿈은 쇠락하고, 아이들은 자라서 집을 떠나고, 황금같이 빛나던 오후들은 사라진다. 돌아보면 오늘의 나를 빚은 건 헌책방의 책들과 시, 어머니의 된장국이다. 창백한 시인으로 살고 싶었으나 뜻밖에도 건강했다. 건강한 게 굴욕으로 느껴지던 이상한 시절, 행복하기 위해 썼지만 시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내 호밀빵과 커피 한 잔, 사과와 신선한 달걀, 무엇보다도 음악이 더 필요했다. 이젠 시 같은 건 없어도 좋을까? 더 생각해 볼 일이지만 인생에 시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다. 그나저나 그 많던 헌책방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