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평마을을 오가는 유일한 763번 시내버스가 상월평마을회관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고 있다. 최지원 기자



울산 울주군 두동면 상월평마을을 오가는 시내버스는 단 한 대. 흔해 빠진 택시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어르신들은 발이 묶인 탓에 장을 보러 가는 길도, 병원을 가는 길도 녹록지 않다. 반복되는 일상 속 간단한 이동조차 쉽지 않은 현실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에 감춰진 이들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만능배달꾼이 가장 많이 받은 배달 의뢰는 어르신들의 '이동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저 어디든 함께 가주는 것이 그 들에게 가장 필요했다.




언양시장을 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서춘화, 김영화 할머니.





언양시장 가는 길 서춘화, 김영화 할머니.


# "꽃구경 가도 됩니까?"

마을 어르신들에게 명함을 나눠드리며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주세요~"라고 말하자 곧바로 "꽃구경 가도 됩니까?"라는 소녀처럼 해맑은 질문이 돌아왔다. 20대 초 상월평마을에 시집 와 평생을 보낸 서춘화(77) 할머니였다. 3월 초라 꽃이 피려면 멀었는데 싶어 "어디로 가면 되냐"고 되묻자 옆에 계신 김영화(85) 할머니가 "언양 시장 말하는 거다"라고 대신 답했다. 마을에서 없는 게 없는 울주군 대표 전통시장 언양시장까지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하고, 이동 시간도 편도로만 1시간 훌쩍 넘는다. 그만큼 할머니들이 쉽게 나서기 어려운 길이다. 서 할머니는 "언양시장 가면 꽃도 팔고 나무도 팔고 다 판다. 할매들이 차가 어디 있노. 택시 탈 수도 없고 꼼짝을 못한다. 좋은 일 하는 아가씨들 왔을 때 구경 가야지~"라며 설렜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장보기란 단순히 물건을 사는 일을 넘어 어쩌다 한번 있는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서춘화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다. 최지원 기자





언양시장에서 꽃 구경 중인 서춘화 할머니.



다음날 곧바로 할머니들을 모시고 언양시장으로 향했다. 언양시장에 도착한 김영화 할머니는 손수 챙겨간 깨를 들고 참기름 가게를 찾았고, 서춘화 할머니는 집 화단에 심을 꽃 묘종을 고르면서 짧은 외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서 할머니는 "이 꽃이 참 예뻐. 이건 심으면 향기가 난다. 저기도 한번 구경 가보자"라며 내내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최복순 할머니가 언양시장의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다.



"미용실도 데려다 주는교?"
단골 미용실까지 데려다 달라는 의뢰도 2건 들어왔다. 최복순(76) 할머니는 언양시장, 신두리(84) 할머니는 옆 동네 두서면을 가야 했다. 미용실이란 자고로 각자의 스타일과 취향에 맞는 곳이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로 30분 남짓이지만 대중교통이 드문 시골에서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머리 손질 한 번 하려면 날을 잡고 나서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일상이 이들에게는 작은 여행과 같았다. 최복순 할머니는 "나는 멀어도 여기만 다녀~ 머리를 잘해. 온 김에 장도 보고 가도 되지요?"라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상월평마을 최고령 최금선(91) 할머니가 밭일을 하고 있다.


# 주름진 손에 가득한 온기

오랫동안 농사일을 해 온 어르신들은 다리며 허리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렇다 보니 병원과 약국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보건소와 한의원은 차로 5분, 버스로 10분, 걸으면 1시간 거리의 '봉계'에 있다. 노령의 어르신들에게는 버스가 가장 접근성이 높지만, 유일한 763번 버스의 배차 간격이 2시간이다 보니 편하게 이용할 수 없는 구조다. 결국 자차가 있는 마을 젊은이들을 수소문해 동행하거나 불편을 참고 또 참는 날들이 이어진다.




상월평마을 최고령 최금선(91) 할머니가 만능배달꾼을 반겨주고 있다. 최지원 기자





상월평마을 최고령 최금선(91) 할머니와 함께 한의원을 가고 있다.



상월평마을 최고령 최금선(91) 할머니도 그 중 한명이다. 만능배달꾼이 한 달 동안 가장 자주 나선 배달은 할머니의 한의원 동행이었다. 20살에 마을로 시집 온 할머니는 평생 밭일을 했다. 지금도 매일 아침 밭으로 출근해 상추, 대파 등 갖가지 채소를 키우는데 대부분 쭈그려 앉아 일하다 보니 몸이 아픈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 다리가 불편해 한의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려고 했지만, 운전은 고사하고 매일 차를 얻어 타기 번거로워 미뤄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른 할머니들의 의뢰를 받아 최 할머니의 한의원 출퇴근을 책임지게 됐다. 최 할머니는 "매일 이렇게 도와줘도 되나? 집에 와 밥 한끼 먹고 가라"라는 말을 항상 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세우며 내미는 주름진 손에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온기가 가득했다. 어떤 날은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1시간 거리를 걸어가던 주민을 만난 적도 있다. 이 주민은 "한의원에 갔다 버스 기다리는데 너무 안오더라고. 기다리느니 걸어가야겠다 싶어서 가는데 마침 만능배달꾼 차가 보여서 손 흔들었지"라고 호탕하게 말했다. 주민의 불편을 덜기 위해 시작된 '만능배달꾼' 목적이 그대로 실현된 순간이었다.




축사에서 조일영 할아버지. 최지원 기자





손을 다친 조일영 할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집을 찾았다.


# 60년 동갑내기 부부와 함께한 발걸음

만능배달꾼이 어디든 데려다 준다는 소문이 어르신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던 어느 날 츤데레 신두리(84) 할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아저씨(남편) 좀 봐주이소". 축사일을 하던 조일영(84) 할아버지가 손을 다쳤다고 했다. 집으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는 일명 '빨간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채 응급처치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밴드 사이로 피가 제법 새어 나오는 게 보였고, 망설일 틈 없이 봉계보건소로 향했다.




조일영 할아버지가 상처를 보여준 후 보건소장님과 이야기 나누고 있다.



할아버지는 "큰 소를 묶어 놓고 송아지를 보러 가는 중에 큰 소가 확 줄을 빼버려 가지고 밀려서 넘어졌다. 별거 아이다. 금방 낫는다~"라고 했지만, 보건소에서는 병원에 가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병원은 차로 15분 거리의 경주시 내남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괜찮다. 약 바르고 놔두면 낫는다"고 손사레 치며 거부했다. 민폐가 될까 걱정하신 듯했다. 이에 보건소장님과의 협공에 나섰고 결국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차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 무사히 치료를 받고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주사도 맞았다. 신두리 할머니에게 미션 완료를 알려드리자 "아이고, 병원 가라고 해도 말을 안듣더만. 참 고맙다. 잘했다"라고 손을 꽉 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84세 동갑내기 신두리·조일영 어르신 부부가 정기 검진을 위해 남구의 한 병원을 가고 있다.


배달을 시작한지 3주차 동갑내기 신두리·조일영 어르신 부부의 정기검진에도 함께 했다. 남구 무거동에 위치한 병원에 가려면 버스로 1시간 걸린다. 시간 맞으면 자녀들이 데려다 주기도 하는데 이번엔 배달꾼이 나섰다. 차 안에서 60여년을 함께 살아온 두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척하면 척'하는 호흡과 노련한 말솜씨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조일영 할아버지는 "아주 옛날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상월평 마을이 아니라 먹정 마을이라고 불렀다. 먹이 난다고", 신두리 할머니는 "저기 크~다란 선바위 알제. 과거에는 해마다 누가 빠져 죽었단다. 그래서 너무 깊다고 들어가지말라고 그물을 쳐 놓았는데 거 귀신이 있단다"라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줘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마지막은 두 어르신이 병원갈 때마다 들른다는 중국집에서 짬뽕 한 그릇 얻어먹는 소소한 호사도 누렸다. 두 어르신은 매번 임무가 끝나면 봉계 맛집을 데려가 주셨다. 이들의 발이 되어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정겨운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신섬미 기자 01195419023@iusm.co.kr신원윤 PD dnjsdbs3930@iusm.co.kr조나령 PD chonaryeong@iusm.co.kr 기자 admin@reelnara.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