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이혜영 기자)



10월31일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차지한 LG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환호하고 있다. ⓒ뉴스1


'가을야구'는 이제 축제의 장이 되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니, 심지어는 야구 규칙을 잘 모르거나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야알못'(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을 빗댄 말), '야린이'(야구+어린이 합성어로 야구 입문자를 뜻함) 등도 야구 뉴스를 말하고, 굿즈에 관심을 나타낸다.  
야구는 매 년 3월 또는 4월 봄에 시즌을 시작한다. 한여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 뒤 10월경에 최종 챔피언을 가리는 한국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경기를 펼친다. 그래서 가을야구라고 한다. 이러한 일정은 세계에서 야구 열기가 가장 뜨거운 미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올해도 LG 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한국시리즈가 10월26일부터 31일까지 펼쳐졌는데, 일본 재팬시리즈 역시 거의 같은 시기(10월25~30일)에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한신 타이거즈의 대결이 있었다(소프트뱅크 우승). 세계 최강 팀이라는 자부심으로 '월드시리즈'로 명명한 미국 메이저리그 챔피언전은 10월25일~11월2일 7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LA 다저스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박찬호·류현진이 에이스로 활약했던 다저스에선 지금 김혜성이 뛰고 있다. 일본의 오타니 쇼헤이와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다저스 투타의 핵심이다. 월드시리즈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다. 한·미·일 세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뿜어내는 열기와 명승부의 프로야구는 이제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거대한 산업이 되고 있다.   
야구장, '경험' 공유하는 선순 환 플랫폼으로
10월31일 밤 대전한화생명볼파크. "무~적 L!G!" "최!강!한!화!" 팬들의 열광과 포효의 함성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LG와 한화의 2025 한국시리즈 대결은 LG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정규시즌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LG는 한화를 상대로 4승1패를 기록하며 1990년, 1994년, 2023년에 이은 통산 4번째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홈구장에서 원정팀인 LG의 우승을 지켜보던 대전 시민들과 한화 팬들도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옴을 느꼈다. 무려 19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감격을 누렸고, 원 없이 가을야구 축제를 즐겼다. 
'쌍둥이 왕조'의 서막을 올린 LG 트윈스와 만년 하위팀의 설움을 딛고 옛 독수리 군단의 명성을 부활시킨 한화 이글스의 대결은 2025년 한 해 동안 흥행 돌풍을 일으킨 한국 프로야구의 화룡정점이었다. '위기'를 말하던 프로야구는 2024년 1000만, 2025년 1200만 명 관중 돌파라는 황금기를 활짝 열어젖혔다.
1231만2519명. 2025년 한국 프로야구가 새롭게 쓴 기록이다. 10개 구단이 펼친 정규시즌 720경기의 대장정은 숨가쁜 순위 다툼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누적 관중 1200만 명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경기당 평균 1만7101명의 관중이 매일 야구장을 찾았다. 프로야구계의 오랜 염원이던 1000만 관중 이정표를 세운 지 불과 1년 만에 또 한번 대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월요일 하루만 쉬고 주 6일간 쉼 없이 이어지는 프로야구 경기는 그 자체로 하루의 뉴스가 되고 일상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예측 불가한 승부의 세계, 관중과 팬덤이 발산하는 역동적인 응원 문화와 경험, 숏폼 재생산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SNS를 활용한 콘텐츠 혁신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야구장은 거대한 선순환 플랫폼이 됐고 2025년 새로운 서사를 완성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춘 마케팅과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
흥행 적시타의 구심점에는 2030 청년세대의 유쾌한 습격이 있다. '보는 야구'에서 '경험과 문화의 아이콘'으로 전환을 이뤄낸 저변에는 2030세대의 막강한 화력이 자리한다. 이들에게 야구장은 '오지 않을 이유가 없는' 장소가 됐다. 9회 혈투를 거쳐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냉혹한 프로스포츠 세계지만 야구와 야구장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라인업송 떼창'부터 응원 구호까지 공간의 '공기'를 공유하는 이 '경험'은 스포츠 공간을 '문화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팬들의 평가는 그만큼 야구가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허구연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와 각 구단이 야구의 경쟁자를 타 스포츠 종목이 아닌 문화산업과 콘텐츠로 지목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여성 관중의 폭발적 증가다. 일단 '꽂히면' 높은 충성도를 보이는 2030 여성들의 발걸음은 야구 문화를 완전히 탈바꿈시키며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냈다. 쾌적한 환경 속에서 즐길거리와 먹거리까지 풍부한 야구장은 가성비가 뛰어난 문화생활의 축이 됐다. KBO에 따르면,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티켓 예매 사이트인 티켓링크를 통해 프로야구 티켓을 예매한 성별 비율은 여성이 57.5%로, 예매 관중의 10명 중 6명을 차지했다. 여성 관중의 증가는 구단과 선수들의 굿즈 다양화와 브랜드와의 콜라보 활성화로 이어졌다.
야구 콘텐츠 제작모임인 '야구공작소' 조훈희 대표는 여성 야구팬들을 직접 인터뷰해 그 특성을 분석한 저서 《담장 너머》에서 △SNS △선수 △야구장 △예능 《최강야구》 △스니저(아이디어를 주변에 확산시키는 인물) △응원문화 △콜라보 굿즈 △가성비라는 8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SNS나 친구,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야구에 입문한 여성들이 직접 야구장을 찾아 응원문화를 접하고 콜라보 굿즈를 소비하며 이를 주변에 재확산하는 경로를 거치면서 강력한 팬덤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상을 포착했다. 조 대표는 "모든 트렌드에는 그것을 추동하는 욕망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연대감과 동질감을 못 느끼는 20대 청년층, 특히 여성들이 이 욕망을 야구를 통해 채워나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허 총재의 어드바이저로 활동하는 전용배 단국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작년과 올해 나란히 천만 관중을 돌파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 장기간에 걸쳐 관중이 야구장을 찾지 않을 요소를 제거해 왔다는 것에 주목한다. 탄탄한 기본기가 바탕이 된 흥행 '홈런'이라는 의미다. 전 교수는 "1200만 관중 돌파는 '반복 방문'이 활성화됐다는 뜻"이라며 "대중의 눈은 냉정하면서도 높다. 공간 그 자체, 그리고 경기력을 포함해 그 공간에서 경험하는 종합적인 것들의 '수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 번은 와도 두 번, 세 번은 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KBO와 각 구단이 오랜 시간을 들여 물리적 환경 개선에 상당한 공을 들였고, 그 기반을 토대로 시대의 흐름에 맞춘 마케팅과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기록적인 흥행을 이끌어냈고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10월2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5 프로야구 KBO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한화 이글스 팬들이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KBO의 승부수는 이뿐만이 아니다. KBO는 2024년 CJ ENM의 OTT 플랫폼인 티빙과 3년간 1350억원(연 450억원) 규모의 뉴미디어 중계권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기존 계약자였던 네이버와 포털 컨소시엄을 통해 야구 중계를 무료로 봐오던 팬들은 '유료화' 전환에 성토를 쏟아냈다. 그러나 2년이 흐른 후 이 결정은 프로야구 전성시대를 연 결정적 장면으로 꼽힌다. 40초 이내의 경기 영상을 비상업적 목적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2차 가공' 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항은 '신의 한 수'가 됐다. KBO와 구단조차 경기 영상을 재가공할 수 없었던 족쇄가 풀리면서 전혀 다른 판도가 전개됐다.
경기 하이라이트는 물론 선수들의 활약상과 관중의 응원전, 축제를 방불케 하는 경기장 내부 장면이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공유되면서 숱한 '짤방'이 만들어졌다. K팝 스타들의 노래로 장식된 유튜브와 SNS에 《부산 갈매기》 《아파트》 《남행열차》가 흘러넘쳤고, 대중이 직접 기획하고 생산한 숏폼 콘텐츠는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야구를 주목하게 하는 촉매제가 됐다. 전문가나 골수팬의 전략 분석과 기술적 접근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콘텐츠가 '풍자'와 '해학' 그리고 '서사'를 담은 이야기들로 확장되면서 프로야구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졌고 자연스럽게 경기장을 찾게 하는 강력한 유인책이 됐다. 이는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형성됐던 기존의 팀 응원문화에서 탈피해 선수 개인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고,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시야를 넓히는 자극제로도 작용했다. 오프라인 경기가 온라인 영상으로, 온라인 영상이 다시 오프라인 야구장 공간으로 이어지도록 한 '40초 마법'이 1200만 관중이라는 르네상스의 마중물이 된 셈이다.
만년 하위팀 한화의 한국시리즈 진출, 공정한 사다리의 상징
'룰과 판정은 예측 가능하게, 경기는 예측 불가능하게'. 프로야구 전성시대를 연 또 다른 핵심 키워드다. 매년 우승팀이 바뀔 정도로 특정 팀이 독주하지 않는, 10개 구단이 모두 '우승 후보'가 될 수 있는 다이내믹한 전력 변화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화두를 팬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특히 준우승을 차지한 한화 이글스는 2020년부터 22년까지 3년 연속 꼴찌였다. 2023년 9위, 2024년 8위에 그쳤다. 오죽하면 그런 한화를 묵묵히 응원하는 팬들을 '보살 팬'이라고 불렀을까. 올 시즌 최대 화두였던 한화의 한국시리즈 진출은 프로야구가 공정한 사다리의 상징임을 보여준다. 
프로야구의 치열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순위 싸움 퍼즐을 완성하는 것은 '신뢰의 야구' 시스템이다. 특히 2024년부터 로봇 심판을 통해 볼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을 처음 도입해 판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인 점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볼과 스트라이크 판정 시비는 프로야구 구단과 팬들의 충돌, 나아가 순위 경쟁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지목돼 왔는데 KBO는 미국과 일본보다 앞서 전 세계 최초로 이를 도입해 오심과 불공정 시비를 차단했다. KBO 측은 "도입 초반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ABS 도입이 공정성과 정확성, 객관성을 입증하면서 팬들의 만족도와 신뢰를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기념비적 발자취를 남긴 프로야구가 계속 진화하기 위해선 야구 산업 저변을 넓히고 다지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용배 교수는 "1200만 관중은 꿈의 숫자다. 구장을 더 늘리지 않는 한 직관 관중 규모를 이보다 더 늘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중소도시와 손잡고 퓨처스리그(2군 리그)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비롯해 프로야구로 눈을 돌린 2030 팬들과 기존 야구팬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하는 실질적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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