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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진휘미   댓글: 0   조회수: 2 날짜: 2025-11-10본문
오리 지날야마토 ┥ 슬롯무료게임 ┥☜ 10.rhf865.top ▩서울 이태원동에 문을 연 패션 브랜드 우영미의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는 패션이란 언어를 매개로 건축, 미식, 음악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 특징이다. 우영미 2025 FW(가을·겨울) 컬렉션을 입은 우영미 디자이너. /임형택 기자
2002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선보였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사우스 오어 노스(South or North)?”부터 묻던 시절이었다. 낯선 땅에서 그는 항상 이방인이었다. 두려웠다. 그만큼 오기도 생겼다. 메인 무대에서 제대로 승부를 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난 후 파리를 대표하는 럭셔리 백화점 ‘르봉 마르셰’에서 그의 이름을 딴 브랜드가 당당히 남성관 매출 1위를 차지했 전세자금대출 상환 다. 이제는 유럽 어느 나라를 가도 그의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은 사람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이름은 ‘우영미(WOOYOUNGMI)’. 1980년대 시작한 솔리드옴므와 자신의 이름을 딴 우영미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운 한국의 대표 패션 디자이너다. 파리를 휩쓴 우영미가 서울에 돌아왔다. 지난달 말 이태원역에 4층짜리 검은색 둥지를 마련했다. 세계 세 번 적십자간호대학 째이자 한국 첫 우영미 플래그십 스토어다. 패션을 매개로 건축, 미식, 음악 등 다양한 매체의 예술이 결합한 공간은 ‘우영미 유니버스’ 그 자체였다. 최근 그곳에서 만난 우 디자이너는 “‘오감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우영미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아카이브 홀. / 렌트카 구입 임형택 기자
▷‘우영미 이태원’을 얼마나 준비했습니까.
“코로나19 때부터 구상하기 시작해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서울 강남 도산공원에 이미 솔리드옴므와 우영미가 함께 있는 ‘맨메이드 도산’이 있긴 하지만, 이제 솔리드옴므란 큰 형님에게서 독립해 우영미만의 ‘유니버 예금은행순위 스’를 보여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죠. 마침 우영미가 여성복까지 시작하면서 여자친구도 생겼고요. 하하.”
▷왜 이태원인가요.
“이태원은 여러 문화가 자유롭게 공존하는 곳이잖아요. 우영미의 지향점도 바로 그것입니다. 서양도 동양도 아니고,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아주 클래식하지도 아주 모던하지도 않고. ‘보더’(border· 든든학자금대출금리 경계)에 서있는다는 점에서 우영미와 이태원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공간은 어디입니까.
“세 가지를 뽑는다면 제가 직접 만든 소파가 있는 1층 라운지, 우영미의 지난 컬렉션을 볼 수 있는 2층 아카이브 홀, ‘디자인 알레’(우현미·우경미 소장)가 만든 옥상 테라스입니다. 특히 테라스는 제 동생인 우현미 소장이 디자인할 때 그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너무나 잘 알고, 저와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이 만든 공간이니까요. 날씨 좋은 날, 탁 트인 테라스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게 정말 행복한 순간이죠.”
▷‘우영미 팬’이 발견해줬으면 하는 디테일이 있습니까.
“절제 속의 우아함. 우영미가 추구하는 바거든요. 건물 전체는 볼드하고 절제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섬세함과 우아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벽에 있는 유리블록 하나도 입체적으로 만들어 빛의 방향에 따라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지죠. 마룻바닥도 원래보다 좁고 가늘게 디자인했고, 벽도 일부러 얼룩덜룩하게 발랐어요. 커피숍 소파는 옷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제작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함께 모이면 우영미 이태원에 들어왔을 때 ‘뭔가 다른 감성이 있다’고 느끼게 되죠.”
▷디자이너로 활동한 지 40여 년입니다. 우영미를 책에 비유한다면 지금의 당신을 만든 챕터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인터내셔널 패션쇼에 국가대표로 참가했을 때입니다. 1등이 영국, 2등이 프랑스, 3등이 한국에서 온 저였어요. 다들 깜짝 놀랐죠. ‘나도 재능이 있다, 뭔가 해보자’는 마음이 그때 싹텄습니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두 번째 챕터는 한국에서 솔리드옴므로 한창 잘나갈 때 파리에서 우영미를 창업했을 때인데, 매일같이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었나요.
“지금이야 한국이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인이 하이패션을 한다고 하면 어이없게 바라봤습니다. 무모했다고 할까요. 정말 처절했죠. 저와 함께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냥 다 그만둘까’라고 심각하게 고민도 했습니다. 제 세 번째 챕터이자, 가장 큰 시련이었어요.”
▷그럼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꾸준함’입니다. 저는 천재도 아니고 환경도 열악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때 파리 패션위크의 모든 브랜드가 디지털 쇼를 했는데, 그게 성에 안 찼어요. 여자 셋이 공항에서 낑낑대며 박스를 옮겨 오프라인 패션쇼를 열었더니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아시아 브랜드 중에서 너희밖에 안 왔다’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느 날 파리의 한 백화점에 갔는데 한 층에는 솔리드옴므, 다른 한 층에는 우영미 매장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우리가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직도 그 순간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제 네 번째 챕터라고 할 수 있죠. 다섯 번째는 진행 중이에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우영미가 파리 첫날 우영미에게 말을 건넨다면요.
“‘너, 각오 단단히 해. 엄청 쫄았지? 앞으로 엄청난 고난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도 너를 너무 자학하지는 마.’ 옛날엔 저 자신을 그렇게 들볶고 의심했거든요. 그 시간을 거치면서,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갔습니다.”
▷최근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입니다.
“극과 극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소회가 정말 남다르죠. 지금이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젊은 세대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정말 놀랍고 좋습니다.”
오프닝 기념행사에서 선보인 고사상. 우영미 디자이너가 병풍을 제작했다. /우영미 제공
▷매장 오프닝 행사로 ‘비나리’를 선보였습니다.
“그날 유럽 언론도 많이 왔는데, 하이엔드 패션의 정점에 있는 이들이 단순히 ‘신기하다’가 아니라 ‘아름답고 세련됐다’고 느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오방색을 약간 변형해 병풍을 제작하고, 그릇과 과일 색감까지 세심하게 맞췄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더라고요. 어느 곳이나 전통과 문화가 있지만 이를 지금 이 시대에 맞게 세련되게 보여주고, 사람들이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브랜드를 키우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패션은 일종의 생물체에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무럭무럭 진화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간신히 기는 아이에게 뛰어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무리해서 외형을 키우면 안 되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오픈마인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1층에 귀 모양의 오브제를 뒀습니다. 이곳에 오는 당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겠다는 마음으로.”
▷패션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습니다.
“지금도 깨어 있는 순간은 내내 패션 생각만 합니다. 침대 옆에 항상 포스트잇을 두죠. 잠자기 전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적을 수 있게. 전 여전히 패션을 사랑하거든요.”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2002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선보였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사우스 오어 노스(South or North)?”부터 묻던 시절이었다. 낯선 땅에서 그는 항상 이방인이었다. 두려웠다. 그만큼 오기도 생겼다. 메인 무대에서 제대로 승부를 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난 후 파리를 대표하는 럭셔리 백화점 ‘르봉 마르셰’에서 그의 이름을 딴 브랜드가 당당히 남성관 매출 1위를 차지했 전세자금대출 상환 다. 이제는 유럽 어느 나라를 가도 그의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은 사람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이름은 ‘우영미(WOOYOUNGMI)’. 1980년대 시작한 솔리드옴므와 자신의 이름을 딴 우영미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운 한국의 대표 패션 디자이너다. 파리를 휩쓴 우영미가 서울에 돌아왔다. 지난달 말 이태원역에 4층짜리 검은색 둥지를 마련했다. 세계 세 번 적십자간호대학 째이자 한국 첫 우영미 플래그십 스토어다. 패션을 매개로 건축, 미식, 음악 등 다양한 매체의 예술이 결합한 공간은 ‘우영미 유니버스’ 그 자체였다. 최근 그곳에서 만난 우 디자이너는 “‘오감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우영미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아카이브 홀. / 렌트카 구입 임형택 기자
▷‘우영미 이태원’을 얼마나 준비했습니까.
“코로나19 때부터 구상하기 시작해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서울 강남 도산공원에 이미 솔리드옴므와 우영미가 함께 있는 ‘맨메이드 도산’이 있긴 하지만, 이제 솔리드옴므란 큰 형님에게서 독립해 우영미만의 ‘유니버 예금은행순위 스’를 보여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죠. 마침 우영미가 여성복까지 시작하면서 여자친구도 생겼고요. 하하.”
▷왜 이태원인가요.
“이태원은 여러 문화가 자유롭게 공존하는 곳이잖아요. 우영미의 지향점도 바로 그것입니다. 서양도 동양도 아니고,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아주 클래식하지도 아주 모던하지도 않고. ‘보더’(border· 든든학자금대출금리 경계)에 서있는다는 점에서 우영미와 이태원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공간은 어디입니까.
“세 가지를 뽑는다면 제가 직접 만든 소파가 있는 1층 라운지, 우영미의 지난 컬렉션을 볼 수 있는 2층 아카이브 홀, ‘디자인 알레’(우현미·우경미 소장)가 만든 옥상 테라스입니다. 특히 테라스는 제 동생인 우현미 소장이 디자인할 때 그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너무나 잘 알고, 저와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이 만든 공간이니까요. 날씨 좋은 날, 탁 트인 테라스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게 정말 행복한 순간이죠.”
▷‘우영미 팬’이 발견해줬으면 하는 디테일이 있습니까.
“절제 속의 우아함. 우영미가 추구하는 바거든요. 건물 전체는 볼드하고 절제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섬세함과 우아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벽에 있는 유리블록 하나도 입체적으로 만들어 빛의 방향에 따라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지죠. 마룻바닥도 원래보다 좁고 가늘게 디자인했고, 벽도 일부러 얼룩덜룩하게 발랐어요. 커피숍 소파는 옷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제작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함께 모이면 우영미 이태원에 들어왔을 때 ‘뭔가 다른 감성이 있다’고 느끼게 되죠.”
▷디자이너로 활동한 지 40여 년입니다. 우영미를 책에 비유한다면 지금의 당신을 만든 챕터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인터내셔널 패션쇼에 국가대표로 참가했을 때입니다. 1등이 영국, 2등이 프랑스, 3등이 한국에서 온 저였어요. 다들 깜짝 놀랐죠. ‘나도 재능이 있다, 뭔가 해보자’는 마음이 그때 싹텄습니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두 번째 챕터는 한국에서 솔리드옴므로 한창 잘나갈 때 파리에서 우영미를 창업했을 때인데, 매일같이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었나요.
“지금이야 한국이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인이 하이패션을 한다고 하면 어이없게 바라봤습니다. 무모했다고 할까요. 정말 처절했죠. 저와 함께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냥 다 그만둘까’라고 심각하게 고민도 했습니다. 제 세 번째 챕터이자, 가장 큰 시련이었어요.”
▷그럼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꾸준함’입니다. 저는 천재도 아니고 환경도 열악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때 파리 패션위크의 모든 브랜드가 디지털 쇼를 했는데, 그게 성에 안 찼어요. 여자 셋이 공항에서 낑낑대며 박스를 옮겨 오프라인 패션쇼를 열었더니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아시아 브랜드 중에서 너희밖에 안 왔다’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느 날 파리의 한 백화점에 갔는데 한 층에는 솔리드옴므, 다른 한 층에는 우영미 매장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우리가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직도 그 순간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제 네 번째 챕터라고 할 수 있죠. 다섯 번째는 진행 중이에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우영미가 파리 첫날 우영미에게 말을 건넨다면요.
“‘너, 각오 단단히 해. 엄청 쫄았지? 앞으로 엄청난 고난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도 너를 너무 자학하지는 마.’ 옛날엔 저 자신을 그렇게 들볶고 의심했거든요. 그 시간을 거치면서,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갔습니다.”
▷최근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입니다.
“극과 극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소회가 정말 남다르죠. 지금이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젊은 세대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정말 놀랍고 좋습니다.”
오프닝 기념행사에서 선보인 고사상. 우영미 디자이너가 병풍을 제작했다. /우영미 제공
▷매장 오프닝 행사로 ‘비나리’를 선보였습니다.
“그날 유럽 언론도 많이 왔는데, 하이엔드 패션의 정점에 있는 이들이 단순히 ‘신기하다’가 아니라 ‘아름답고 세련됐다’고 느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오방색을 약간 변형해 병풍을 제작하고, 그릇과 과일 색감까지 세심하게 맞췄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더라고요. 어느 곳이나 전통과 문화가 있지만 이를 지금 이 시대에 맞게 세련되게 보여주고, 사람들이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브랜드를 키우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패션은 일종의 생물체에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무럭무럭 진화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간신히 기는 아이에게 뛰어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무리해서 외형을 키우면 안 되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오픈마인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1층에 귀 모양의 오브제를 뒀습니다. 이곳에 오는 당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겠다는 마음으로.”
▷패션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습니다.
“지금도 깨어 있는 순간은 내내 패션 생각만 합니다. 침대 옆에 항상 포스트잇을 두죠. 잠자기 전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적을 수 있게. 전 여전히 패션을 사랑하거든요.”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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