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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진휘미   댓글: 0   조회수: 0 날짜: 2025-12-1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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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기 이전 한복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민창식. 동아일보 1926년 6월22일치. 임경석 제공
1. 투옥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6·10 만세운동 거사 예정일이 4일 앞으로 다가왔다. 유인물 10만 장 인쇄를 모두 마치고 전국 배포를 위해 안전한 곳으로 반출하는 일도 마무리한 뒤였다. 당시 스물여덟이던 민창식은 긴장과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직장 매일신보사 인쇄소에 정시 출퇴근하는 데 신경 쓰던 그는 1926년 6월6일 밤 9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종로경 바다이야기고래 찰서 고등계 소속 경찰 10여 명이 안국동 26번지, 조선공산당의 비밀 인쇄소로 사용된 기와집을 급습했다. 경찰은 개가를 올렸다. 현장에서 무언가 논의하던 용의자 3명을 붙잡았다. 민창식, 양재식(28), 이용재(21). 세 인쇄 노동자는 10만 장 항일 격문을 인쇄한 주역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찰은 “큰 궤짝에 감춰 넣은 인쇄기계 두 대와 궤 속에 골드몽릴게임 가득 넣어둔 종이”도 압수했다.1 항일 격문과 인쇄하고 남은 종이가 가득했다. ‘범죄’의 생생한 증거물이었다.
밤 9시의 일이라 가족들이 체포 과정을 목격했을 성싶다. 삯바느질로 자식을 키워온 홀어머니 송씨, 아마 50대 초반쯤 되지 않았을까. 젊은 아내 김옥희 그리고 7살 아들 병엽이 두려움 속에서 가장이 붙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으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리라. ‘죗값’은 혹독했다. 민창식은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조선 독립을 주장한 대가로 가혹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뒷날 재판정에서 그는 고문받은 사실을 폭로했다. 1927년 10월25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에서 과감히 발언했다.2
체포되자마자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고, 경찰서에서 취조받는 중에도 시종 고문을 받았 릴게임종류 다. 검사국으로 이첩돼 형무소에 수감된 뒤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행한 조서상 진술은 모두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창식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6·10 만세운동에 사용할 방대한 인쇄물을 제작하고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 가담한 죄였다. 그러나 실제로 구금된 기간은 선고 형량보다 길었다. 그는 1929년 12월 바다이야기오락실 말 출옥했다. 체포된 날짜로부터 계산하면 3년7개월 동안이나 수감된 셈이었다.
출옥 후에도 민창식은 투지를 꺾지 않았다. 석방된 지 며칠 안 된 1930년 1월2일, 출판노동조합 새해 간친회 모임에 얼굴을 내밀었다. 인쇄·출판 노동자 7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임석 경찰의 제지로 소감을 얘기할 기회는 봉쇄됐지만, 노동자 동료들로부터 “은근한 가운데 옥중 고생을 위로”하는 따스한 시선을 받았다.3
그뿐만이 아니다. 2월7일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공산청년회 간부 고광수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망자에 대한 연민과 고문 수사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민창식을 비롯한 출옥자들의 상여 행렬 참석을 금지했다.
그해 3월에는 경찰에 또 체포됐다. 출옥한 지 석 달 만이었다. 국제당이 직접 지도하는 공산당 재조직 비밀결사(국제선) 사건에 연루된 혐의였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그의 혐의는 모쁘르(국제혁명가후원회) 책임자 김한(金翰)이 출옥자들에게 제공한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은 사실에 한정돼 있었다. 덕분에 민창식은 머지않아 석방될 수 있었다.
사건 기록을 보면 민창식의 주소가 변경된 게 눈에 띈다. ‘경기도 시흥군 노량진리 202’였다. 가장이 근 4년간 수감돼 있던 중에 남은 가족은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한강마저 넘어야 했다.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중에 가족이 겪었을 쓴 생활고가 느껴진다.
경찰 수사는 허점이 많았다. 민창식은 실제로는 국제선 공산그룹에 조직적으로 연루돼 있었다. 경찰은 그 사실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 민창식은 석방된 지 얼마 안 돼 국경을 넘었다. 비밀결사 대표로 선발돼 러시아 모스크바로 파견됐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중앙간부 권오직이 발급한 암호 위임장을 휴대한 채였다.
가장이 먼 길을 떠날 때 가족은 그것이 영영 이별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저 한두 해 떨어져 사는 것으로 알았을 터였다. 젊은 아내는 남편의 부재 속에서 오래도록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야 했고, 11살 아들은 가난과 아버지가 부재한 환경에서 성장해야만 했다.
민창식의 필적. 박헌영 앞으로 쓴 1930년 11월28일치 편지 마지막 쪽. 연필로 썼으며 순한글인 점이 이채롭다. (C) РГАСПИ 임경석 제공
2. 망명
국경을 넘은 그해, 1930년 11월28일 민창식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체류하고 있었다. 다소 의아하다. 왜 목적지 모스크바가 아닌 극동 지방에 머물러 있었을까? 그날 민창식이 모스크바의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박헌영은 국제당 동방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중이었으므로 민창식이 겪는 어려움을 도울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편지의 중요 부분을 함께 읽어보자.
“동무여 건강하시며, 세죽 동무도 건강히 공부 잘하고, 어린 동무도 잘 자라고, 또한 그곳 여러 동무들 다 건강하십니까. (…) 권오직 동무가 나에게 이곳으로 보낼 때에 단순히 직업대회에만 가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고, 그 동무들의 잡힌 경과도 보고하여 주어 모쁘르에도 가서 좀 물질적 후원을 받도록 하여 달라 하였던 것인데 (…) 나는 그 동무들로부터 정당한 암호의 만다트까지 얻어가지고 위에 말한 그러한 사명을 띠고 왔던 터이니, (…) 동무가 힘쓰시면 국제당에서도 자기에게 보낸 사람이니까 그저 개인으로 온 것과는 좀 달리 처리할 듯합니다.”4
첫머리는 사적인 인사말로 이뤄져 있다. 상대방의 건강을 묻고, 부인 주세죽의 안부도 물었다. ‘세죽 동무’가 공부도 잘하고 있는지 묻는 것을 보니, 그녀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학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린 동무’의 성장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부부가 러시아로 망명한 직후 출산한 아이, ‘비비안나’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수신자의 현재 직위와 주소, 아내의 이름과 하는 일, 어린 딸의 존재 등을 알고 있는 점으로 미뤄보아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는 친밀했던 것 같다.
민창식은 자신의 러시아 입국이 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업대회에 조선 대표로 출석하는 것이었다. 직업대회란 1930년 8월15~30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프로핀테른(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의 임무는 국제선 공산그룹 검거 사건의 경과를 국제당에 보고하고, 수감된 동지들을 위해 모쁘르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민창식은 자신의 임무를 제때 수행할 수 없었다. 프로핀테른 제5차 대회에는 다른 두 조선인이 대표 자격으로 출석했다. 장회건, 한병류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블라디보스토크 뷰로가 발급한 위임장을 지니고 있었다. 발급 일자는 각각 7월8일과 7월17일이었다.5
이로 미뤄보면 국내에서 파견된 민창식은 대회가 임박할 때까지 미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월경이 늦어진 탓에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두 가지 소임을 이행할 수 없었다.
민창식은 자신의 과실로 그렇게 늦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거기에는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국경을 비밀리에 넘는 데 어려움이 있었거나 먼 길 여행을 가능하게 할 돈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민창식은 고민에 싸였다. 러시아에 계속 체류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진퇴유곡에서 방황”하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민창식은 마음속 바라는 바를 토로했다. “몇 해 동안 우리의 전술·전략을 배워가지고 조선으로 나아가” 혁명운동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만약에 그것이 어렵다면 취업도 좋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에 조선문 인쇄소를 새로 설립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주라블레프(민창식) 학생카드. (C) РГАСПИ 임경석 제공
3. 공산대학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아카이브에 주라블레프(Журавлев)라는 학생의 개인카드가 보존돼 있다. 바로 민창식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그에 따르면 민창식은 바라는 바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1년 5월31일 입학이 허용됐다. 혁명 전략과 전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됐다. 박헌영 앞으로 입학 청원 편지를 쓴 지 6개월 뒤였다. 아마도 박헌영은 민창식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심껏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산대학의 정식 수학 연한은 3년이었다. 그러나 민창식에게 허용된 것은 속성 코스였다. 1932년 11월 졸업했다. 1년반 동안 재학했던 것이다. 속성과는 짧은 기간에 좀더 효율적으로 혁명가를 양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1930년부터 시행된 제도였다.6
공산대학을 졸업한 뒤 민창식의 행방에 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매우 적다. 다만 그가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두 번째 희망 사항이던 모스크바에서의 취업을 실행에 옮겼던 것 같다. ‘이스크라 레볼류치’(혁명의 불꽃)라는 명칭의 인쇄소에서 조선어와 일본어 활자 식자공으로 일했다. 자신의 경험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국제공산당에서 발간하는 조선어와 일본어 출판물을 인쇄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 같다.
모스크바 거주를 선택한 민창식은 스탈린 폭압의 매서운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938년 1월11일 체포돼 3월27일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첩보기관의 스파이로 활동했고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는 무장봉기를 주도했다는 혐의였다. 평생토록 맞서 싸웠던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고? 항일운동에 헌신한 혁명가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형의 선고가 있은 지 불과 보름 만에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8년 4월11일이었다. 그때 나이가 고작 39살이었다.7
1.‘인쇄기계 압수’, 동아일보, 1926년 6월8일
2.京城地方法院 判事 矢本正平, ‘高允相外90名公判調書(第18回)’, 1927년 10월25일, ‘高允相外100名 (治安維持法違反等)’, 경성지방법원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3.‘출판노조 신년간친회’, 중외일보, 1930년 1월4일
4.민창식, ‘박헌영 동무 앞’, 1930년 11월28일, 2~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71 л.118~119об.
5.“mandate(Пак-Су)”, 1930년 7월8일, РГАСПИ ф.534 оп.1 д.172 л.163 ; “mandate (Lee Tai-Young)”, 1930년 7월17일, РГАСПИ ф.534 оп.1 д.172 л.160.
6.우동수,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코민테른’,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한길사, 1991년, 581쪽.
7.‘스탈린 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인명편 1)’, 독립기념관, 2019년, 439쪽.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
1. 투옥
디데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6·10 만세운동 거사 예정일이 4일 앞으로 다가왔다. 유인물 10만 장 인쇄를 모두 마치고 전국 배포를 위해 안전한 곳으로 반출하는 일도 마무리한 뒤였다. 당시 스물여덟이던 민창식은 긴장과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직장 매일신보사 인쇄소에 정시 출퇴근하는 데 신경 쓰던 그는 1926년 6월6일 밤 9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종로경 바다이야기고래 찰서 고등계 소속 경찰 10여 명이 안국동 26번지, 조선공산당의 비밀 인쇄소로 사용된 기와집을 급습했다. 경찰은 개가를 올렸다. 현장에서 무언가 논의하던 용의자 3명을 붙잡았다. 민창식, 양재식(28), 이용재(21). 세 인쇄 노동자는 10만 장 항일 격문을 인쇄한 주역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찰은 “큰 궤짝에 감춰 넣은 인쇄기계 두 대와 궤 속에 골드몽릴게임 가득 넣어둔 종이”도 압수했다.1 항일 격문과 인쇄하고 남은 종이가 가득했다. ‘범죄’의 생생한 증거물이었다.
밤 9시의 일이라 가족들이 체포 과정을 목격했을 성싶다. 삯바느질로 자식을 키워온 홀어머니 송씨, 아마 50대 초반쯤 되지 않았을까. 젊은 아내 김옥희 그리고 7살 아들 병엽이 두려움 속에서 가장이 붙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으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리라. ‘죗값’은 혹독했다. 민창식은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조선 독립을 주장한 대가로 가혹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뒷날 재판정에서 그는 고문받은 사실을 폭로했다. 1927년 10월25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에서 과감히 발언했다.2
체포되자마자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고, 경찰서에서 취조받는 중에도 시종 고문을 받았 릴게임종류 다. 검사국으로 이첩돼 형무소에 수감된 뒤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행한 조서상 진술은 모두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창식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6·10 만세운동에 사용할 방대한 인쇄물을 제작하고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 가담한 죄였다. 그러나 실제로 구금된 기간은 선고 형량보다 길었다. 그는 1929년 12월 바다이야기오락실 말 출옥했다. 체포된 날짜로부터 계산하면 3년7개월 동안이나 수감된 셈이었다.
출옥 후에도 민창식은 투지를 꺾지 않았다. 석방된 지 며칠 안 된 1930년 1월2일, 출판노동조합 새해 간친회 모임에 얼굴을 내밀었다. 인쇄·출판 노동자 7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임석 경찰의 제지로 소감을 얘기할 기회는 봉쇄됐지만, 노동자 동료들로부터 “은근한 가운데 옥중 고생을 위로”하는 따스한 시선을 받았다.3
그뿐만이 아니다. 2월7일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공산청년회 간부 고광수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망자에 대한 연민과 고문 수사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민창식을 비롯한 출옥자들의 상여 행렬 참석을 금지했다.
그해 3월에는 경찰에 또 체포됐다. 출옥한 지 석 달 만이었다. 국제당이 직접 지도하는 공산당 재조직 비밀결사(국제선) 사건에 연루된 혐의였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그의 혐의는 모쁘르(국제혁명가후원회) 책임자 김한(金翰)이 출옥자들에게 제공한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은 사실에 한정돼 있었다. 덕분에 민창식은 머지않아 석방될 수 있었다.
사건 기록을 보면 민창식의 주소가 변경된 게 눈에 띈다. ‘경기도 시흥군 노량진리 202’였다. 가장이 근 4년간 수감돼 있던 중에 남은 가족은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한강마저 넘어야 했다.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중에 가족이 겪었을 쓴 생활고가 느껴진다.
경찰 수사는 허점이 많았다. 민창식은 실제로는 국제선 공산그룹에 조직적으로 연루돼 있었다. 경찰은 그 사실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 민창식은 석방된 지 얼마 안 돼 국경을 넘었다. 비밀결사 대표로 선발돼 러시아 모스크바로 파견됐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중앙간부 권오직이 발급한 암호 위임장을 휴대한 채였다.
가장이 먼 길을 떠날 때 가족은 그것이 영영 이별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저 한두 해 떨어져 사는 것으로 알았을 터였다. 젊은 아내는 남편의 부재 속에서 오래도록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야 했고, 11살 아들은 가난과 아버지가 부재한 환경에서 성장해야만 했다.
민창식의 필적. 박헌영 앞으로 쓴 1930년 11월28일치 편지 마지막 쪽. 연필로 썼으며 순한글인 점이 이채롭다. (C) РГАСПИ 임경석 제공
2. 망명
국경을 넘은 그해, 1930년 11월28일 민창식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체류하고 있었다. 다소 의아하다. 왜 목적지 모스크바가 아닌 극동 지방에 머물러 있었을까? 그날 민창식이 모스크바의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박헌영은 국제당 동방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중이었으므로 민창식이 겪는 어려움을 도울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편지의 중요 부분을 함께 읽어보자.
“동무여 건강하시며, 세죽 동무도 건강히 공부 잘하고, 어린 동무도 잘 자라고, 또한 그곳 여러 동무들 다 건강하십니까. (…) 권오직 동무가 나에게 이곳으로 보낼 때에 단순히 직업대회에만 가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고, 그 동무들의 잡힌 경과도 보고하여 주어 모쁘르에도 가서 좀 물질적 후원을 받도록 하여 달라 하였던 것인데 (…) 나는 그 동무들로부터 정당한 암호의 만다트까지 얻어가지고 위에 말한 그러한 사명을 띠고 왔던 터이니, (…) 동무가 힘쓰시면 국제당에서도 자기에게 보낸 사람이니까 그저 개인으로 온 것과는 좀 달리 처리할 듯합니다.”4
첫머리는 사적인 인사말로 이뤄져 있다. 상대방의 건강을 묻고, 부인 주세죽의 안부도 물었다. ‘세죽 동무’가 공부도 잘하고 있는지 묻는 것을 보니, 그녀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학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린 동무’의 성장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부부가 러시아로 망명한 직후 출산한 아이, ‘비비안나’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수신자의 현재 직위와 주소, 아내의 이름과 하는 일, 어린 딸의 존재 등을 알고 있는 점으로 미뤄보아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는 친밀했던 것 같다.
민창식은 자신의 러시아 입국이 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업대회에 조선 대표로 출석하는 것이었다. 직업대회란 1930년 8월15~30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프로핀테른(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의 임무는 국제선 공산그룹 검거 사건의 경과를 국제당에 보고하고, 수감된 동지들을 위해 모쁘르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민창식은 자신의 임무를 제때 수행할 수 없었다. 프로핀테른 제5차 대회에는 다른 두 조선인이 대표 자격으로 출석했다. 장회건, 한병류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블라디보스토크 뷰로가 발급한 위임장을 지니고 있었다. 발급 일자는 각각 7월8일과 7월17일이었다.5
이로 미뤄보면 국내에서 파견된 민창식은 대회가 임박할 때까지 미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월경이 늦어진 탓에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두 가지 소임을 이행할 수 없었다.
민창식은 자신의 과실로 그렇게 늦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거기에는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국경을 비밀리에 넘는 데 어려움이 있었거나 먼 길 여행을 가능하게 할 돈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민창식은 고민에 싸였다. 러시아에 계속 체류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진퇴유곡에서 방황”하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민창식은 마음속 바라는 바를 토로했다. “몇 해 동안 우리의 전술·전략을 배워가지고 조선으로 나아가” 혁명운동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만약에 그것이 어렵다면 취업도 좋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에 조선문 인쇄소를 새로 설립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주라블레프(민창식) 학생카드. (C) РГАСПИ 임경석 제공
3. 공산대학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아카이브에 주라블레프(Журавлев)라는 학생의 개인카드가 보존돼 있다. 바로 민창식의 러시아식 이름이다. 그에 따르면 민창식은 바라는 바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1년 5월31일 입학이 허용됐다. 혁명 전략과 전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됐다. 박헌영 앞으로 입학 청원 편지를 쓴 지 6개월 뒤였다. 아마도 박헌영은 민창식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심껏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산대학의 정식 수학 연한은 3년이었다. 그러나 민창식에게 허용된 것은 속성 코스였다. 1932년 11월 졸업했다. 1년반 동안 재학했던 것이다. 속성과는 짧은 기간에 좀더 효율적으로 혁명가를 양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1930년부터 시행된 제도였다.6
공산대학을 졸업한 뒤 민창식의 행방에 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매우 적다. 다만 그가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두 번째 희망 사항이던 모스크바에서의 취업을 실행에 옮겼던 것 같다. ‘이스크라 레볼류치’(혁명의 불꽃)라는 명칭의 인쇄소에서 조선어와 일본어 활자 식자공으로 일했다. 자신의 경험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국제공산당에서 발간하는 조선어와 일본어 출판물을 인쇄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 같다.
모스크바 거주를 선택한 민창식은 스탈린 폭압의 매서운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938년 1월11일 체포돼 3월27일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첩보기관의 스파이로 활동했고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는 무장봉기를 주도했다는 혐의였다. 평생토록 맞서 싸웠던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고? 항일운동에 헌신한 혁명가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형의 선고가 있은 지 불과 보름 만에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8년 4월11일이었다. 그때 나이가 고작 39살이었다.7
1.‘인쇄기계 압수’, 동아일보, 1926년 6월8일
2.京城地方法院 判事 矢本正平, ‘高允相外90名公判調書(第18回)’, 1927년 10월25일, ‘高允相外100名 (治安維持法違反等)’, 경성지방법원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3.‘출판노조 신년간친회’, 중외일보, 1930년 1월4일
4.민창식, ‘박헌영 동무 앞’, 1930년 11월28일, 2~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71 л.118~119об.
5.“mandate(Пак-Су)”, 1930년 7월8일, РГАСПИ ф.534 оп.1 д.172 л.163 ; “mandate (Lee Tai-Young)”, 1930년 7월17일, РГАСПИ ф.534 оп.1 д.172 л.160.
6.우동수,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코민테른’,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한길사, 1991년, 581쪽.
7.‘스탈린 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인명편 1)’, 독립기념관, 2019년, 439쪽.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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