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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진휘미   댓글: 0   조회수: 0 날짜: 2025-12-1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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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119sh.info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거제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함에도 바깥에서 몰아치는 풍랑을 막아내는 고역을 바다신릴게임 자처했다. 그만큼 바닷물에 깎이고 내줘야만 했다. 덕분에 잔잔한 바다를 연안에 선사했다. 이로써 진해만에 접한 여러 고장이 풍요로울 수 있었다.
섬이 앉은 곳은 또한 일본, 정확히는 대마도와 가장 가깝다. 이런 입지는 섬이 짊어진 운명이었다. 필연적으로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먼저 닿았다. 그 바람에 오랜 기간 사람이 릴게임가입머니 살지 않는 빈 섬으로 지내야 했다. 남해의 여러 섬과 함께다.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세포에서 출항한 게 대표적이다.
바다이야기하는법
▲ 거제부(1872년_지방지도) 지도 중간 오른쪽의 국사봉 주변으로 옥포진과 지세포진이, 왼쪽 상단에 장목진이 보인다. 섬의 서쪽인 왼쪽으로 사등리 읍성과 고현읍성, 그리고 1663년 가배량 옆 거제로 이전한 읍치(邑治)가 가장 화려하고 크게 그려져 있다. 지도 맨 아래에 한산도 '제승당 바다이야기고래 '도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아름다운 만큼 모진 영욕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이순신 장군의 첫 승리인 옥포해전 터엔 우람해 끝도 없는 조선소가 들어앉았다. 이곳이 6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년 만에 명멸한 '장승포'이기도 하다. 반면 정유재란의 칠천량 패전은 우리 해전사에 치욕으로 남았다. 칠천량의 주 무대인 칠천도 남쪽, 가조도 아래 바다에도 거대한 조선소가 세계 일류의 조선술을 선보이고 있다.
조선업은 이처럼 거제의 자랑이지만, 또한 조선업 부침에 따라 섬의 삶이 출렁거리기도 했다. 내부에서보다 외부의 상황변동에 심하게 요동치곤 했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섬이 타고난 운명이랄 밖엔 달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이순신이 좁은 견내량으로 왜군을 유인해 섬멸했다. 견내량을 건너는 다리가 통영에 잇닿아 섬이 다시 태어났다. 한반도 동남쪽 부산을 향한 육로는 오랜 염원이었을까? 빙 돌아나가던 길을, 바다에 인공구조물을 가라앉히는 침매터널과 해상교량으로 가덕도 지나 부산을 이었으니 신기원이다. 이로써 섬이 눈부신 발전의 길에 접어들기를.
▲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북한군 포로와 유엔(UN) 군이 쓰던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가, 거제시청 주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지난 11월 중순 촬영.
ⓒ 이영천
한국전쟁의 수많은 상흔 중 하나인 포로수용소가 엷은 흔적으로 남았다. 수십만의 포로와 유엔군 막사로 사용하던 공간이 이제 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반공과 용공으로 나뉜 포로수용소는, 그 좁은 공간에서마저 극심한 이념 대결을 벌였다.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 포로가 수백이다. 지독한 야만이다. 비교적 온전했던 고현읍성이 이때 대부분 훼철되었다.
▲ 포로수용소와 고현 마을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와 거제 고현리 마을의 모습.
ⓒ 이영천(포로수용소유적공원_안내판)
염세를 느낀 수백이 한반도가 아닌 제3국을 택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이명준도 그중 하나다. 극심하게 경도된 이념의 광장은 지금 온데간데없다. 그 한쪽에 애당초 조선의 판옥선 모양으로 쌓았다는 고현읍성이 반파된 형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수월리로 쉽지 않은 귀환
거대한 조선소와 인구 25만에 육박하는 해양 도시가, 고려 말엔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섬이었다. 극악한 왜구의 표적을 원천적으로 없애자는 것이다. 섬 백성을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킨다. '공도화(空島化)' 정책이다.
따라서 거제 관청도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섬을 떠난 관청이 내륙 깊숙한 덕유산 자락 거창에 있었다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바닷가가 아닌 산으로 옮겨진 셈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거제와 거창은 모두 진주목에 속했고, 왜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거창은 최적의 안전지대였다.
고려 말은 이처럼 나라가 바다를 버린 시대였다. 비워진 섬들은 국가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상흔이었고, 거창으로 옮겨진 관청은 그 현시적 결과물의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 들어 상황이 바뀐다. 태종과 세종 때 해상 방어가 강화된다. 나아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에 이른다. 이제 더는 바다와 섬을 비워둘 이유가 없었다. 침략에 맞서 섬을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방어책이자 적극적인 주권 행사다.
▲ 옥포진과 수월리(1872년_지방지도_부분) 지금은 거대한 조선소 차지가 된 둥근 만(灣)의 옥포와 옥포진성이 보인다. 그 아래에 회색의 국사봉이, 그 밑에 '水月里(수월리)'가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거제로 백성이 돌아온다. 1422년이다. 맨 처음 정착한 곳이, 독봉산과 국사봉 사이의 수월리다. 지금은 초·중학교 이름만 남아있다. 이때 읍성을 쌓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본래 거창에 속하였다가 후에 다시 거제로 돌아왔다'라고 기록한다.
거제로 귀환은 단순한 정책 변화 이상이다. 시대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라가 백성과 영토를 어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세종이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바닷가 사등리로
비워졌던 섬에 백성들 이주가 쉬웠을 리 만무하다. 분명 여러 유인책이 뒤따랐을 것이다. 실록은 수월리에 목책을 두어 최소한으로 방어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륙이라서 지리적으로 왜구 침략에 신속히 맞서지 못하는 한계와 읍성으로서 부적절성이 부각 된 것으로 보인다. 해안에서 멀었고, 교통로 확보와 수군 통제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결론은 읍성 이전이다.
▲ 사등리 읍성 가조도 동남쪽 바닷가에 1448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사등리 읍성의 서쪽 성벽. 서쪽과 북쪽 성벽 일부만 온전하게 복원 되었다. 전체적으로 둥근 성곽의 모양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 이영천
1427년(세종) 1월 13일 자 실록에 거제 백성의 장계가 있다.
'병오(1426)년 봄에 다시 사등리를 선정하여 읍(邑)을 옮겨 비로소 성곽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객사·공아(公衙)·국고(國庫)·관청을 새로 옮겨온 읍에 적은 수의 백성들 힘으로는 수년 안에 축성하기가 어렵겠사오니, 청컨대 가까운 곳 각 포의 수군과 각 고을 군사들을 동원하면 많은 일수를 역사(役事)하지 않더라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읍성을 지키는 군사가 300명이라는 수치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거제에 이주한 백성과 군사들이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읍성을 쌓는 울력에 명확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1451년(문종) 5월 6일 자 실록의 한 부분이다.
'거제현 사람이 상언 하기를 "본 읍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에 목책을 설치하였었으나, 지난 병오년(1426)에 사등리로 옮겨 관사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무진년(1448)에 이르러 끝났는데"…(후략)'
이로 미루어 사등리 읍성이 1448년에 이르러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사등리 읍성 서문 문루가 없는 둥근 옹성의 서문이 단아하게 복원되어 있다.
ⓒ 이영천
성곽 둘레 986m에 높이 5m, 너비 5m의 석성으로 쌓았다. 읍성의 공간 구조는 '卍'자형이다. 성곽을 둘러, 인접한 들판보다 낮고 넓은 해자를 만들어 수비를 강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월리에서 사등리로 읍성을 옮긴 사유에 버금가는 단점이 드러난다. 바로 우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1448년 이후 다시 고현리로 읍성을 옮긴다. 이를 문종이 단호하게 결정 짓는다. 왜구의 침략에,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읍성 안이 물 부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신속한 이주가 결정된다. 참으로 고단한 여정이다.
판옥선 닮은 읍성에서
앞의 문종실록 같은 날의 기사다.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을 버티며 괴롭히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고현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고현리로 읍성을 옮기려는 문종의 뜻이 확고하다. 하루빨리 옮기라 명한다.
▲ 고협읍성 서벽 거제시청의 뒤편에서, 판옥선의 선미(船尾)였을 고현읍성의 서벽이 낮고 두텁게 뻗어 있다.
ⓒ 이영천
결국 나라가 고현리로 읍성을 옮기도록 명령했다. 거친 땅에 새로 성을 쌓아야만 했던 백성들 고충이 얼마였을까? 벌써 세 번째다. 익숙한 터전을 떠나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는 노동이 수십 년이나 반복되고 있다. 비바람과 장마, 추위 속에서도 멈추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섬을 터전 삼아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읍성은 숙명 같은 존재였다.
▲ 북문(계룡루)과 고현읍성 고현읍성은 북문을 비롯한 600여 미터의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1663년 거제면으로 행정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거제도의 중심이었다. 문루 '계룡(鷄龍)'은 복원하면서 시민들 공모로 지은 이름이다.
ⓒ 이영천
당시 거제의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관아와 주요 마을 백성이 나선다면 능히 축성이 가능한 정도였다. 1453년 둘레 1,430m, 높이 4m의 성곽이 완공된다. 고현리로의 이전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다. 생활과 방어를 함께 고려한 국가적 판단이다.
반파한 판옥선으로 남은 지금의 고현읍성을 거닐다 보면, 15세기 백성들의 땀과 숨결이 저절로 느껴진다. 우물 하나를 위해 읍성을 옮긴 선택이, 거제 시민의 공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고현읍성은 임진왜란 때 함락된다.
▲ 기성관(거제 관아) 1663년 고현읍성에서 거제면으로 옮겨 온 거제현 관아 기성관. 마치 객사처럼 규모가 웅장하다. 이곳에는 따로 성곽을 쌓지 않았다.
ⓒ 이영천
전란이 끝난 1663년, 행정 기능을 분리해 가배량의 경상우수영 가까운 거제만으로 읍치를 이전한다. 지금의 거제면이다. 거제면엔 따로 읍성을 쌓지 않았다. 다만, 등 뒤에 삼국시대부터 튼실한 옥산성에 의지했을 개연성이 높다. 임진왜란 후 왜구의 침탈이 한풀 꺾인 점도 성곽 없이 관아와 객사만을 둔 배경이다.
섬으로 태어나, 가까이 왜를 두었다는 입지적 여건이 섬을 질곡으로 빠뜨렸다. 거듭된 난리에 피아간 섬을 요충지로 삼았다. 곳곳에 성을 쌓았다. 조선은 물론 왜도 거제에 여러 왜성을 쌓았다.
그런 고장이 지금 전 세계를 호령하는 조선업의 중추다. 입지는 이처럼 어떻게 극복해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아름다운 섬 거제를 어떤 모습으로 가꿔갈지는 이제 오로지 우리 몫이다. 여러 차례 읍성을 옮겨 다니며 고역을 치른 조상의 가호가 분명 있을 것이기에.
[이영천 기자]
거제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함에도 바깥에서 몰아치는 풍랑을 막아내는 고역을 바다신릴게임 자처했다. 그만큼 바닷물에 깎이고 내줘야만 했다. 덕분에 잔잔한 바다를 연안에 선사했다. 이로써 진해만에 접한 여러 고장이 풍요로울 수 있었다.
섬이 앉은 곳은 또한 일본, 정확히는 대마도와 가장 가깝다. 이런 입지는 섬이 짊어진 운명이었다. 필연적으로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먼저 닿았다. 그 바람에 오랜 기간 사람이 릴게임가입머니 살지 않는 빈 섬으로 지내야 했다. 남해의 여러 섬과 함께다.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세포에서 출항한 게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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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부(1872년_지방지도) 지도 중간 오른쪽의 국사봉 주변으로 옥포진과 지세포진이, 왼쪽 상단에 장목진이 보인다. 섬의 서쪽인 왼쪽으로 사등리 읍성과 고현읍성, 그리고 1663년 가배량 옆 거제로 이전한 읍치(邑治)가 가장 화려하고 크게 그려져 있다. 지도 맨 아래에 한산도 '제승당 바다이야기고래 '도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아름다운 만큼 모진 영욕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이순신 장군의 첫 승리인 옥포해전 터엔 우람해 끝도 없는 조선소가 들어앉았다. 이곳이 6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년 만에 명멸한 '장승포'이기도 하다. 반면 정유재란의 칠천량 패전은 우리 해전사에 치욕으로 남았다. 칠천량의 주 무대인 칠천도 남쪽, 가조도 아래 바다에도 거대한 조선소가 세계 일류의 조선술을 선보이고 있다.
조선업은 이처럼 거제의 자랑이지만, 또한 조선업 부침에 따라 섬의 삶이 출렁거리기도 했다. 내부에서보다 외부의 상황변동에 심하게 요동치곤 했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섬이 타고난 운명이랄 밖엔 달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이순신이 좁은 견내량으로 왜군을 유인해 섬멸했다. 견내량을 건너는 다리가 통영에 잇닿아 섬이 다시 태어났다. 한반도 동남쪽 부산을 향한 육로는 오랜 염원이었을까? 빙 돌아나가던 길을, 바다에 인공구조물을 가라앉히는 침매터널과 해상교량으로 가덕도 지나 부산을 이었으니 신기원이다. 이로써 섬이 눈부신 발전의 길에 접어들기를.
▲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북한군 포로와 유엔(UN) 군이 쓰던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가, 거제시청 주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지난 11월 중순 촬영.
ⓒ 이영천
한국전쟁의 수많은 상흔 중 하나인 포로수용소가 엷은 흔적으로 남았다. 수십만의 포로와 유엔군 막사로 사용하던 공간이 이제 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반공과 용공으로 나뉜 포로수용소는, 그 좁은 공간에서마저 극심한 이념 대결을 벌였다.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 포로가 수백이다. 지독한 야만이다. 비교적 온전했던 고현읍성이 이때 대부분 훼철되었다.
▲ 포로수용소와 고현 마을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와 거제 고현리 마을의 모습.
ⓒ 이영천(포로수용소유적공원_안내판)
염세를 느낀 수백이 한반도가 아닌 제3국을 택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이명준도 그중 하나다. 극심하게 경도된 이념의 광장은 지금 온데간데없다. 그 한쪽에 애당초 조선의 판옥선 모양으로 쌓았다는 고현읍성이 반파된 형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수월리로 쉽지 않은 귀환
거대한 조선소와 인구 25만에 육박하는 해양 도시가, 고려 말엔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섬이었다. 극악한 왜구의 표적을 원천적으로 없애자는 것이다. 섬 백성을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킨다. '공도화(空島化)' 정책이다.
따라서 거제 관청도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섬을 떠난 관청이 내륙 깊숙한 덕유산 자락 거창에 있었다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바닷가가 아닌 산으로 옮겨진 셈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거제와 거창은 모두 진주목에 속했고, 왜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거창은 최적의 안전지대였다.
고려 말은 이처럼 나라가 바다를 버린 시대였다. 비워진 섬들은 국가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상흔이었고, 거창으로 옮겨진 관청은 그 현시적 결과물의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 들어 상황이 바뀐다. 태종과 세종 때 해상 방어가 강화된다. 나아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에 이른다. 이제 더는 바다와 섬을 비워둘 이유가 없었다. 침략에 맞서 섬을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방어책이자 적극적인 주권 행사다.
▲ 옥포진과 수월리(1872년_지방지도_부분) 지금은 거대한 조선소 차지가 된 둥근 만(灣)의 옥포와 옥포진성이 보인다. 그 아래에 회색의 국사봉이, 그 밑에 '水月里(수월리)'가 보인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거제로 백성이 돌아온다. 1422년이다. 맨 처음 정착한 곳이, 독봉산과 국사봉 사이의 수월리다. 지금은 초·중학교 이름만 남아있다. 이때 읍성을 쌓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본래 거창에 속하였다가 후에 다시 거제로 돌아왔다'라고 기록한다.
거제로 귀환은 단순한 정책 변화 이상이다. 시대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라가 백성과 영토를 어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세종이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바닷가 사등리로
비워졌던 섬에 백성들 이주가 쉬웠을 리 만무하다. 분명 여러 유인책이 뒤따랐을 것이다. 실록은 수월리에 목책을 두어 최소한으로 방어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륙이라서 지리적으로 왜구 침략에 신속히 맞서지 못하는 한계와 읍성으로서 부적절성이 부각 된 것으로 보인다. 해안에서 멀었고, 교통로 확보와 수군 통제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결론은 읍성 이전이다.
▲ 사등리 읍성 가조도 동남쪽 바닷가에 1448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사등리 읍성의 서쪽 성벽. 서쪽과 북쪽 성벽 일부만 온전하게 복원 되었다. 전체적으로 둥근 성곽의 모양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 이영천
1427년(세종) 1월 13일 자 실록에 거제 백성의 장계가 있다.
'병오(1426)년 봄에 다시 사등리를 선정하여 읍(邑)을 옮겨 비로소 성곽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객사·공아(公衙)·국고(國庫)·관청을 새로 옮겨온 읍에 적은 수의 백성들 힘으로는 수년 안에 축성하기가 어렵겠사오니, 청컨대 가까운 곳 각 포의 수군과 각 고을 군사들을 동원하면 많은 일수를 역사(役事)하지 않더라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읍성을 지키는 군사가 300명이라는 수치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거제에 이주한 백성과 군사들이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읍성을 쌓는 울력에 명확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1451년(문종) 5월 6일 자 실록의 한 부분이다.
'거제현 사람이 상언 하기를 "본 읍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에 목책을 설치하였었으나, 지난 병오년(1426)에 사등리로 옮겨 관사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무진년(1448)에 이르러 끝났는데"…(후략)'
이로 미루어 사등리 읍성이 1448년에 이르러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사등리 읍성 서문 문루가 없는 둥근 옹성의 서문이 단아하게 복원되어 있다.
ⓒ 이영천
성곽 둘레 986m에 높이 5m, 너비 5m의 석성으로 쌓았다. 읍성의 공간 구조는 '卍'자형이다. 성곽을 둘러, 인접한 들판보다 낮고 넓은 해자를 만들어 수비를 강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월리에서 사등리로 읍성을 옮긴 사유에 버금가는 단점이 드러난다. 바로 우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1448년 이후 다시 고현리로 읍성을 옮긴다. 이를 문종이 단호하게 결정 짓는다. 왜구의 침략에,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읍성 안이 물 부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신속한 이주가 결정된다. 참으로 고단한 여정이다.
판옥선 닮은 읍성에서
앞의 문종실록 같은 날의 기사다.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을 버티며 괴롭히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고현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고현리로 읍성을 옮기려는 문종의 뜻이 확고하다. 하루빨리 옮기라 명한다.
▲ 고협읍성 서벽 거제시청의 뒤편에서, 판옥선의 선미(船尾)였을 고현읍성의 서벽이 낮고 두텁게 뻗어 있다.
ⓒ 이영천
결국 나라가 고현리로 읍성을 옮기도록 명령했다. 거친 땅에 새로 성을 쌓아야만 했던 백성들 고충이 얼마였을까? 벌써 세 번째다. 익숙한 터전을 떠나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는 노동이 수십 년이나 반복되고 있다. 비바람과 장마, 추위 속에서도 멈추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섬을 터전 삼아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읍성은 숙명 같은 존재였다.
▲ 북문(계룡루)과 고현읍성 고현읍성은 북문을 비롯한 600여 미터의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1663년 거제면으로 행정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거제도의 중심이었다. 문루 '계룡(鷄龍)'은 복원하면서 시민들 공모로 지은 이름이다.
ⓒ 이영천
당시 거제의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관아와 주요 마을 백성이 나선다면 능히 축성이 가능한 정도였다. 1453년 둘레 1,430m, 높이 4m의 성곽이 완공된다. 고현리로의 이전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다. 생활과 방어를 함께 고려한 국가적 판단이다.
반파한 판옥선으로 남은 지금의 고현읍성을 거닐다 보면, 15세기 백성들의 땀과 숨결이 저절로 느껴진다. 우물 하나를 위해 읍성을 옮긴 선택이, 거제 시민의 공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고현읍성은 임진왜란 때 함락된다.
▲ 기성관(거제 관아) 1663년 고현읍성에서 거제면으로 옮겨 온 거제현 관아 기성관. 마치 객사처럼 규모가 웅장하다. 이곳에는 따로 성곽을 쌓지 않았다.
ⓒ 이영천
전란이 끝난 1663년, 행정 기능을 분리해 가배량의 경상우수영 가까운 거제만으로 읍치를 이전한다. 지금의 거제면이다. 거제면엔 따로 읍성을 쌓지 않았다. 다만, 등 뒤에 삼국시대부터 튼실한 옥산성에 의지했을 개연성이 높다. 임진왜란 후 왜구의 침탈이 한풀 꺾인 점도 성곽 없이 관아와 객사만을 둔 배경이다.
섬으로 태어나, 가까이 왜를 두었다는 입지적 여건이 섬을 질곡으로 빠뜨렸다. 거듭된 난리에 피아간 섬을 요충지로 삼았다. 곳곳에 성을 쌓았다. 조선은 물론 왜도 거제에 여러 왜성을 쌓았다.
그런 고장이 지금 전 세계를 호령하는 조선업의 중추다. 입지는 이처럼 어떻게 극복해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아름다운 섬 거제를 어떤 모습으로 가꿔갈지는 이제 오로지 우리 몫이다. 여러 차례 읍성을 옮겨 다니며 고역을 치른 조상의 가호가 분명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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